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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Jun 23. 2020

받아치진 못했어도, 화나는 이유는 알고 싶어

갈등이 발생하는 세 가지 지점

 

"너 생일날 생일밥 뭐 먹고 싶어?" 친구 질문에 별 생각없이 대답했어요."음... 오믈렛?" 그랬더니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생일밥이 오믈렛이라니. 소박하기도 하셔라."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한참이 지난 후에야 화가 나더라구요. 사실 그땐 제가 화내도 되는지조차 몰랐어요. (30대 중반 A님)


오랜만에 만난 친구 O와 얘기하다 뭔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봤어요. 그게 몇 번 계속되니까, 친구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어! 너, 소시오패스같다? 어떻게 공감 능력 1도 없냐." 그런데 그 얘길 그날 자기 SNS에까지 올리더라구요. 너무 놀랐어요. 머리가 하얘져서 뭐라고 말해야될지 모르겠더라구요. (40대 초반 B님)


친구들과 셋이서 송년회를 했어요. 다들 기분 좋게 취하자 Y가 X의 연애에 조언을 하기 시작했죠. X는 딱히 반기지 않는 눈치였어요. 점점 둘의 목소리가 커졌고 전 그 자리가 불편했어요. Y에게 그만하라고 말했죠. 그러자 Y는 저더러 이상하대요. X의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지 않고 왜 그냥 덮으려 하냐구요. 그 후 한 달이나 지나도 불쾌한 여운이 남아 있더라구요요. Y 말대로 정말 제가 이상한 걸까요. (20대 후반 C님)


남편은 제가 아이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자꾸 다그쳐요. 남편은 자기 자식이 SKY를 못 가는 낙오자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대요. 남편 말을 듣다 보면 'SKY를 못 간다고 낙오자는 아닌데' 싶어요. 그런데 저도 오랫동안 SKY를 동경했기에 아무 말도 못해요. (40대 중반, D님)


위의 네 분은 글쓰기를 시작하시기 전 이런 이야기를 내게 털어 놓으셨다. 네 분 모두 뭐라고 받아쳤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내가 뭐라고 받아쳤어야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왜 화가 나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일단 일어난 일부터 글로 옮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 때 6하원칙을 지키는 게 좋다. 누구와 어디서 언제 만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말이 오갔는지. 이 때 나와 상대방의 말을 꼭 직접화법으로 쓴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어 보자. 그 순간 상대방의 어떤 단어, 어떤 표현에 내가 흔들렸는지 알게 된다.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한 사건을 경험했을 때. 화가 나는 건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 순간 우리는 갈등을 알아챈 거다. 내 안의 갈등이든 남과의 갈등이든. 


갈등은 대개 세 가지 지점에서 발생한다.



첫째,  개념에 대한 정의가 모호할 때


"너 생일날 생일밥 뭐 먹고 싶어?" 친구 질문에 별 생각없이 대답했어요."음... 오믈렛?" 그랬더니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생일밥이 오믈렛이라니. 소박하기도 하셔라."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한참이 지난 후에야 화가 나더라구요. 사실 그땐 제가 화내도 되는지조차 몰랐어요. (30대 중반 A님)


A 님에게 여쭤봤다. 

"A님은 생일밥을 정의하고 계시나요?"

 "그야.... 그 때는 제 생일이니까 생일밥은 제가 생일날 먹고 싶은 밥이죠."


"그럼 친구는 생일밥을 뭐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음... 걔가 말한 생일밥은 '뭔가 비싸고 예뻐서 인스타그램에도 올릴 수 있는 밥'이었겠죠."


A 님은 친구와 '생일밥'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달랐다. 두 사람이 같은 대상을 두고 다른 관점으로 정의한다는 것 뿐 누가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이유를 알았으면 A님이 B에게 혼잣말으로라도 받아칠 수 있다.


"친구야, 그날은 내 생일 맞지?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게 최고의 생일밥이야."



둘째, 사실 관계가 불분명할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 O와 얘기하다 뭔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봤어요. 그게 몇 번 계속되니까, O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어! 너, 소시오패스네? 어떻게 공감 능력 1도 없냐." 그 얘길 그날 저녁 자기 SNS에까지 올리더라구요. 전 머리가 하얘져서 뭐라고 말해야될지 모르겠더라구요. (40대 초반 B님)


"어! 너, 소시오패스네? 어떻게 공감 능력 1도 없냐." 이 말을 들었던 B 님의 마음 속에선 소용돌이가 일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하냐...' 


친구의 말이 너무 심해서 깜짝 놀라서 아무 것도 못했지만, 사실 이건 어렵지 않은 문제다. B님이 자신이 소시오패스인지 아닌지만 제대로 판단한다면 말이다. '엥? 내가 소시오패스? 에이 아냐.' 를 자신있게 얘기하기 위해 B님은 소시오패스의 정확한 정의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불분명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거다.  


소시오패스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개념을 접하면, B님은 다음과 같은 문답을 스스로 할 수 있다(나는 이 과정을 글로 쓰시길 권한다).


'내가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적이 있나? 아니. 성공하려고 노력한 적도 별로 없지만 난 무슨 일을 할 때 수단과 방법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물론 나쁜 짓을 저지른 적도 '양심의 가책'을 안 느낀 적도 없다. 난 나쁜 짓 하면 '양심의 가책'을 너무 많이 느낀다. 난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B님의 친구는 '소시오패스'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에서 B님에게 함부로 낙인을 찍은 거다. 이런 분석을 하고 나면, B님이 소시오패스라기보단, 친구 O가 말을 함부로 해서 친구에게 상처주는 사람이 된다. 둘의 입장이 바뀌는 거다. B님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O야, 내가 소시오패스면 넌 자존감 뱀파이어냐?"



셋째, 가치관이 상반될 때


갈등이 일어났을 때 원인 파악이 가장 쉽지 않은 건 세 번째 경우다. C님과 D님의 이야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가치관이 상반될 때 어떤 가치가 이면에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면, 내가 겪은 사건을 글로 옮기고 글 속 등장인물들이 동의하고 있는 전제를 써 보기를 권하고 싶다. 


친구들과 셋이서 송년회를 했어요. 다들 기분 좋게 취하자 Y가 X의 연애에 조언을 하기 시작했죠. X는 딱히 반기지 않는 눈치였어요. 점점 둘의 목소리가 커졌고 전 그 자리가 불편했어요. Y에게 그만하라고 말했죠. 그러자 Y는 저더러 이상하대요. X의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지 않고 왜 그냥 덮으려 하냐구요. 그 후 한 달이나 지나도 불쾌한 여운이 남아 있더라구요요. Y 말대로 정말 제가 이상한 걸까요. (20대 후반 C님)


C님은 Y와 서로 다른 전제에 동의하고 있었다.

- [C님이 동의하고 있는 전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남의 개인사에 오지랖을 떨 자격은 없다."

- [Y가 동의하고 있는 전제] "친구를 위한다면 개인적인 문제라도 필요한 조언을 해 줘야 한다."


각자가 동의하고 있는 전제에서 C는 개인주의자고, Y는 오지라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법하다. 그러나 둘은 서로 다를 뿐 누구도 이상하지 않다. C님은 이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나의 영역에 누가 개입하는 것도, 친구의 영역에 내가 개입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단지 X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도록 X를 존중하고 싶었을 뿐이다. Y 말대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난 이상하지 않다. Y와 다를 뿐이다."  


우리 무의식에는 우리 각자를 오래도록 지배해 온 전제가 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으로 생긴 그 전제는 타인을 향한 편견이기도 하고, 삶을 바라보는 비합리적 신념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런 것을 인물에 내재된 '프로그램'이라 불렀고,  <이야기의 탄생> 저자 윌 스토는 우리 머릿 속의 '견고하고도 불완전한 세계 모형'이라 불렀다. 내 안에 존재하는 전제가 하나이고 그것이 타인의 전제와 상반될 때는 '외적 갈등'이 일어난다. 타인과 나 사이의 갈등이다. C 님의 경우 친구 Y와 갈등을 겪은 거다.


반면 내가 동의하고 있는 전 제가 둘 이상일 때는 '내 마음 나도 몰라'다. 이럴 때 발생하는 게 바로 '내적 갈등'이다. D님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남편은 제가 아이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자꾸 다그쳐요. 남편은 자기 자식이 SKY를 못 가는 낙오자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대요. 남편 말을 듣다 보면 '그건 아닌데' 싶지만, 저도 오랫동안 SKY를 동경했기에 아무 말도 못해요. (40대 중반, D님)


D님이 동의하고 있는 전제는 두 가지이다. 


- [D님의 전제 1] 좋은 대학 나온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 [D님의 전제 2] 좋은 대학 나와야 행복하다.


여기까지 분석해드렸을 때, D님은 엄마가 된 이후 전제 1과 2 사이에서 늘 우왕좌왕해왔음을 고백하셨다. [전제 2] 때문에 남편 말에 동의했고 남편에게 어떤 반박도 못했지만 [전제 1]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거다. 만약 D님의 머릿 속에 [전제 2]만 있었다면, 남편과 일심동체가 되어 아이 교육에 열성인 엄마로 살아왔을 거다.


그러나 D님은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이 주제로 글을 쓰시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셨다. 그 과정에서 D님은 [전제 1]이 [전제2]보다 우선시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글의 후반부를 쓰시며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덮기 위해 학벌이 중요하다고 믿어왔음을 발견하셨다. [전제 2]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라기보단 스스로를 가리기 위해 이용해온 신념이었다.


 <당신이 옳다> 저자 정혜신 박사는 생각이 아닌 감정이 바로 100% 자신이라고 했다. 화가 날 때는 보통 내가 중시하는 어떤 신념, 가치관이 훼손되었을 때다. 그걸 캐치해 내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나 내 머리가 화나는 이유와 갈등의 실체를 찾아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 시간 차가 존재한다는 게 재미있다.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건 이때이다. 시간을 줄여준다. 글쓰기는 평생을 끌어온 내 인생의 미제사건을 단번에 해결해주기도 한다.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평생 동의해 온 전제. 내가 겪은 일과 그 때 내 감정을 두서없이 쓰다보면 드러나게 돼 있다. 


글을 쓰면 하루 묵힌 후 읽는 게 좋다. 남의 시선으로 읽게 된다. 쓸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의 '프로그램'과 '세계모형'이 행간에서 보인다.  


'새벽 감성'으로 쓴 글이 대낮에 부끄러운 건 어쩌면 내 '프로그램'과 '세계모형'에서 날것 그대로의 내가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글쓰기는 '나를 만나는 글쓰기'다. 나에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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