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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26. 2017

“패션테러리스트지만 훈남 되고 싶습니다.”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 여덟 번째 컨설팅 스토리

#1 “꾸미면 멋질 거라는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28 □□군은 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예의 바르면서 진지한 글이 왠지 보고서 같아 미소를 띈 채 읽어 내려갔다.


혼자 보기 아까운 그의 사연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배님, 일단 선배님의 용기 있는 결정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꼭 선택하신 진로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선배님께 조언을 얻고자 이렇게 메모를 남깁니다.
통학은 운전을 하기도 하고 대중교통(지하철+버스)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신체는 키 183, 몸무게 78입니다. 체형은 비교적 건장해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마르다/건장하다 둘다 듣습니다.) 얼굴은 흔히 말하는 흔남입니다. 안경을 쓰고 다니고 필요에 따라 렌즈도 병행합니다. 슬프지만 나이에 비해 노안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스키와 같은 스피드 스포츠이고, 그래서 그런지 피부톤은 검은 편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주로 남자 또래들, 스키 동호회 관련 사람들입니다. 여자 친구는 없습니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게임은 잘 하지 않고 드라마, TV 같은 것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다만 악기에는 관심이 있어 악기를 좀 다룹니다. 성격은 밝은 편이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 저에 대해 꽤 서술했다고 생각하나, 혹시라도 더 궁금하시다면 성심성의껏 답변 드리겠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고 싶은 부분은 저에 대한 코디입니다. 제가 평소에 너무나 옷, 헤어 등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마다 꾸미면 참 멋질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동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최근에 어떠한 자극이 생겨서 저에 대한 코디를 잘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일단 코디 목적은 1. 소개팅 2. 학회/세미나 같은 공식적인 자리를 위함입니다. 소개팅도 많이 나가게 되고 학회도 많이 다닙니다. 따라서 댄디해 보이는 코디를 잘해보고 싶습니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얻고 싶습니다.
이를 감히 한 번에 정리해보자면, 댄디+헤어스타일+어려보임+옷의 편함(가능하다면)입니다. 스타일을 위해 구입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산은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사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아 너무 비싼 옷들은 조금 꺼리게 될 것 같습니다.


며칠 후 □□군을 만났다.


정말! 첫인상은 ‘오! 정말이네. 꾸미면 진짜 멋있겠다.’였다.


글에서 내가 봤던 ‘노안’이란 푸념과는 달리 나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방긋방긋 짓는 그의 모습에서 심지어 욘사마가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스타일에 전혀 신경을 안 쓴, 연구실에서 몇날 며칠이고 밤을 새다 잠시 식당에 밥 먹으러 내려온 것 같은 전형적인 공대 대학원생의 모습이었다. 그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가며 내 얘기에 경청해주는 덕분에 이야기는 술술 진행되었다.


그 전날 □□군의 ‘나만의 음악’을 문자 메시지로 물어봤었는데, 그의 답에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음……. 장르를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래식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그랜드 폴로네이즈 브릴리안테, 드뷔시 ‘달빛’, 팝은 Hunter Hayes의 ‘Love too much’, Adam Levine ‘Lost stars’, 가요는 썸데이 ‘알고 있나요’ 정도입니다. 피아노곡으로 쇼팽 녹턴 8번도 매우 좋아합니다.”


잠시 웃음을 멈추고 답을 보냈다. “딱 한 곡만 고르면?” 잠시 후 돌아온 그의 답은

“매우 어렵지만 Hunter Hayes의 ‘Love too much’로 하겠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날, 나는 그가 고른 곡 팝 두 곡을 들어봤다. Adam Levine의 ‘Lost stars’가 아닌 Hunter Hayes의 ‘Love too much’를 고른 이유가 뭐였을까 하면서.


Maroon5의 보컬이기도 한 Adam Levine의 ‘Lost stars’는 보컬의 음색 자체가 주는 느낌에 겉멋과 기교까지 더해져 노래가 화려하다는 인상이었다. 반면, Hunter Hayes의 ‘Love too much’는 좀 더 절제미가 느껴졌다. 그게 내가 느낀 두 곡의 차이점이었다.


 □□군에게 곡을 들은 소감을 풀어놓으며 나 역시 드뷔시의 ‘달빛’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Hunter Hayes의 ‘Love too much’와 드뷔시 ‘달빛’ 두 곡에서 모두 절제되고 조용한 화려함이 느껴진다고 하자 □□군은 자신의 취향이 딱 그러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에게 마냥 얌전한 건 별로지만, 그렇다고 너무 화려한 것도 싫다.


그는 자연계 졸업생들이 많이 응시하는 전문대학원에 합격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자기는 자신의 전공인 공학이 좋아 고민 끝에 결국 공대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는 얘기를 풀어놓는다. 남들이 선망하는 성공이나 명예보단 자신의 탐구 세계를 사랑하는 친구이다.


그의 얘길 들으며, ‘아하 (에니어그램 5번) 탐구자로군.’이라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예의바른 모습에서 충성스러운 자(6번 날개)의 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내 짐작만으로 그의 스타일링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군 자신이 바라보는 자아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기에 다음 시간까지 해 올 숙제를 내줬다.


숙제가 ‘나는 어떤 여행객인가’를 25자 이내로 적어오는 것이라고 일러주자 □□군이 곧바로 질문한다.

“25자를 넘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나는 깔깔 웃으며 물론 상관은 없으나 너무 길면 앞으로 옷장을 꾸리기가 불편해 진다고 짧을수록 좋다고 알려주었다.


그것이 □□군에게 다소 어려운 숙제라고 느껴져서 곧바로 나는 □□군에게 부가적으로 숙제를 내줬다. 만약 3개월 안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10가지 정도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보라고. 그리하면 자신을 어떤 여행자로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질 거라고 알려줬다.


그 말을 듣고 □□군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저는 아마 죽을 때까지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캐나다) ◇◇로 돌아가서 스키만 타게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는 SNS에서 다음 약속을 위해 서로 시간을 맞춰보았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확정하고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군에게 이런 문장을 보냈다.

“내일 봐,  ◇◇ 스키어!”

직전까지 1초도 안 되어 답을 달던 □□군이 갑자기 반응이 없다. 10초 정도 후 답이 왔다.

“넵, 알겠습니다!”



#2 충실하게 그리고 분석적으로


두번 째 만남의 날.


□□군은 자신이 누구인지 상당히 고민한 흔적을 여과 없이 내게 보여줬다. 사실 딱히 공개해도 부끄러울 것 없는 내용인데도 “선배님께만 알려드리는” 아무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란다(자신을 남에게 내보이길 꺼리는 이런 게 탐구자들의 특징이다).


비밀스럽게 자신의 일상을 공개한 □□군은 스키 동호회에서의 모습, 연구실에서의 모습, 교회에서 성가대 대원으로서의 모습이 제각각이라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을 훑은 후 나는 얘기했다.


그 때 그 때 맥락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그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난 결과일 뿐일 거라고. 그러자 이내 수긍을 하며 뭔가 안심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혼자서 그렇게 고민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여행객인지에 대한 답이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 전날 내가 SNS에서 남긴 ‘◇◇ 스키어’가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 스키어’만으로는 연구실에서 몇날 며칠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괄할 수 없어 ‘◇◇ 스키어 리서처’라는 다소 엉성한 결론을 내려왔다.


나는 □□군에게 제안했다.

“스키어 301 어때?”


301. 사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301이라는 숫자만 들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301의 1차적 의미는 캠퍼스 내 301동 건물을 칭한다. 301동은 다른 건물들과 동떨어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 곳에는 전기전자공학부, 기계항공공학부, 컴퓨터공학과가 있다.


내 학부 시절 경험에 따르면, 그곳 학생들은 학생회관이나 도서관이 있는 캠퍼스 중앙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301동에 갇혀서 몇날 며칠 밤새 치킨 시켜 먹어가며 실험을 하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컴퓨터 앞에서 코드나 짜고 있다.


내게 301동은 너드(nerd) 집합소 같은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다. 301이란 숫자는 그런 독특한 공대생의 정체성을 함축한 표현이다.


□□군은 내 제안을 듣고 몇 번이나 되뇐다.

“스키어 301? 스키어 301……. 스키어 301? 스키어 301……. 스키어 301! 좋습니다!”


그도 그렇게 연구실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해가며 연구하고, 결과를 찾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이 좋다는 것이다.


이제 ‘스키어 301’군이 내게 가져온 ‘왠지 끌리는 룩’을 보기로 했다.


이런, 별로 특별한 게 없었다. 블레이저와 치노 팬츠, 청바지에 셔츠와 스웨터, 치노 팬츠와 셔츠와 스웨터에 코트를 입은 룩 정도였다. 그는 깔끔한 남자 모범생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의 룩을 캡처해왔다. 그가 또 예의바르지만 허당같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댄디한 게 좋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나는 그가 누군지,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대략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라는 과제를 해결했다.


그 다음부터는 ‘냉정한 감상자’가 되기 위한 훈련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토털룩을 제공하는 망고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스키어 301’군과 함께 이런 저런 법칙이 적용된 스타일리쉬한 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진에 나타난 룩이 스타일리쉬하면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건지, 스타일리쉬하지 않은 룩이라면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매치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서 밀도 있게 토론했다.


여기서 내가 깜짝 놀란 것은 탐구자다운 ‘스키어 301’군의 놀라운 집중력과 분석력이었다. 사례 분석 횟수가 누적될수록 능숙하게 스타일리쉬함의 법칙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다. 게다가 내가 돌발 퀴즈로 준비해 간 여자 연예인 룩의 옥의 티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던 어려운 문제였는데) 순식간에 찾아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일리쉬함의 법칙을 학습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어떤 아이템이 자신에게 필요한지도 체크하게 되었다는 것.


“아 이런 룩이 멋있는 이유는 화이트 스니커즈 때문이군요. 여기에 검정 구두 신었으면 진짜 답답해 보였을 것 같아요.”라며 화이트 스니커즈를 꼭 사야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제가 아무 무늬 없는 흰 티셔츠나 흰 셔츠가 하나도 없네요.”라며 화이트 셔츠와 티셔츠를 사야겠다고 메모하기도 했다.


그리고 댄디하게만 입으면 웹사이트에서 입은 모델의 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스키어 301’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줄 스포티한 아이템을 룩에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그렇다고 평상복을 스키복으로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옷을 사려고 하면 옷 자체에 디테일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Less is more!’ 디테일이 적을수록 활용도는 높은 것.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빼기의 법칙’을 적용하여 옷은 심플하게 입되, ‘더하기의 법칙’을 적용하여 스포티한 시계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자 “사실 스키어들은 시계를 안 차요.”라고 받아쳤지만, 아무렴 어때.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아이템을 추가해서 자신을 확인하는 스타일링을 한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댄디한 걸 추구하면서도, 실험실에서 밤새 연구에 몰두하기도 좋아하고, 스키 같이 스피디한 스포츠도 좋아하는 ‘스키어 301’이라는 사람이 드러나도록 이런 저런 룩을 만들어갔다.


스웨터에 이너웨어로 면 티셔츠를 겹쳐 입는 룩, 슬랙스에 포멀한 스니커즈를 매치하는 룩,  청바지에 셔츠, 스웨터, 코트를 입은 댄디한 룩에 조금은 과감한 스포츠 시계를 매치하는 룩, 야상 점퍼에 포멀한 슬랙스 그리고 갈색 부츠를 매치하는 룩.


‘스키어 301’군은 그 과정에서 “남자가 어떻게 부츠를…….”, “화이트 스니커즈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와 같은 고정관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신이 마초가 아니냐며 쑥스러워 했지만, 나는 그 또한 (6번 충성스런 자의 날개를 가진 그 답게) ‘남자’라는 성별에 충실하려는 모습일 거라며 웃었다.


그의 ‘남자’ 성별에 충실하려는 모습은 쇼핑 팁을 알려주는 내 말에 “남자가 어떻게 피팅룸에서 사진을…….”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런 ‘남자다움’에 대해 나는 직언을 했다.


'301'군! 고정관념을 버릴수록 스타일리쉬한 시도를 더 많이 할 수 있어.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의외로 이내 수긍을 해 주었다. ‘배우는 자’로서 또 충실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스키어 301’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완성해 보았다.

• 포멀한 백팩 – ‘301’로서의 포멀함 + ‘스키어’로서의 활동성
• 스포티한 시계 – 댄디한 룩에 ‘스키어 301’의 정체성을 드러내줄 포인트 아이템
• 생지 데님
• 기본 겨울 코트
• 스웨터/카디건
• 화이트 긴팔 크루넥 티셔츠
• 화이트 셔츠
• 화이트 스니커즈, 갈색 부츠
• 멋진 안경


#3 ‘안다’의 틀, 그대로


며칠 후 ‘스키어 301’군과 함께 쇼핑을 위해 여의도에서 만났다.


어머나!


평소 연구실에 있다가 잠깐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댄디한’ 모습. 갈색 구두, 치노 팬츠, 셔츠, 스웨터, 블레이저, 그리고 콘택트렌즈까지!    


쇼핑에는 불편한 복장을 갖춘 이유를 묻자, 평소 내게 배웠던 법칙을 적용해서 실습해 보고 내게 검사받고 싶었단다. 그날의 복장 역시 ‘충성스런 사람’의 일면임을 확인하고 깔깔 웃었다.


쇼핑몰에서 나는 ‘스키어 301’군의 적극적인 태도에 깜짝 놀랐다. 물론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하기에 앞서, ‘피팅룸에서는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만 하고 나오지 말고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당부하긴 했었다. “남자가 어떻게 피팅룸에서 사진을…….”하며 빼던 ‘스키어 301’군이었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 피팅룸 밖 거울 앞에서 남의 시선 상관없이 열심히 촬영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쇼핑 전에 당부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어떤 핑계도 대지 말고, 무조건 입어 보기!’


내가 입어보라고 건네준 옷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라도 일단은 시도해보는 적극적인 ‘스키어 301’군의 모습. 나는 정말 감동받았다. 안경점에서도 좀 과한 안경테라도 개의치 않고 다 착용해 보며 거울 앞을 떠나지 않던 그의 모습에서 어떤 열성이 느껴졌었다.


내가 칭찬을 해 주자 ‘301’군이 말한다. 앞선 상담에서 ‘반대의 법칙’이나 ‘빼기의 법칙’에 대해 듣는 동안 고정관념들이 많이 깨졌단다.


나는 ‘301’군과 쇼핑을 하며 참 재미있는 점을 확인했다. 물론 에니어그램이 사람의 성격을 단정 짓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향성을 파악하기에는 꽤나 쓸 만한 모형임에 틀림없다. 그를 ‘충성스런 자의 날개를 가진 탐구자(5w6)’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고나 할까.


처음 나와 만났을 때 블로그에서 성격유형별 패션 성향에 대한 글을 읽은 소감을 말하며, ‘301’군이 내게 고해성사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5번 유형의 사람들이 뭐 하나 맞는 브랜드 발견하면, 거기서만 산다는 문장을 읽고, 제 모습을 고스란히 읽힌 것 같아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탐구자’ 유형의 사람들은 ‘안다’라는 걸 인생의 목표처럼 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에 관심이 가면, 일단 깊게 파헤쳐 다 알아야 하고 그것을 완전히 다 알고 나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생소한 것은 일단 의심하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라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는 의사결정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301’군은 나와 상담을 하는 동안 주로 망고(Mango) 사이트의 사진으로 스타일링 훈련을 했던 터라 (역시 '안다'에서 안전함을 확인하려는 듯) 망고의 옷이 익숙해서 좋다며 맨 먼저 망고 매장에 가보자고 했었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고르는 동안에는 많은 멋쟁이들이 신는 프레드 페리 스니커즈를 신으면서 구매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난 (‘빼기의 법칙’이 잘 적용된) 아무런 디테일이 없는 A브랜드의 화이트 스니커즈를 구입하자고 권했다. 그러자 그는 A브랜드가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브랜드라며 꺼렸다.


시계를 보기 위해서 마침 그날 방문한 쇼핑몰에 매장이 입점해 있는 파슬(Fossil)에 방문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고려하는 브랜드 리스트에는 전혀 올라와있지도 않은 브랜드라며 불편해했다.


그러나 매장을 찬찬히 둘러보며, 그 브랜드가 자신이 사고 싶던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대에서 판매하는 점을 그 동안은 전혀 몰랐다며 신선한 충격을 받는 눈치였다.


같은 날 함께 쇼핑을 했었던 ‘세련된 꼰대’군이 쇼핑백을 잔뜩 들고 귀가했던 것과는 달리 ‘301’군은 ‘꼰대’군 보다 더 많이 입어보고 더 많이 촬영했지만 유니끌로에서 9900원에 기간 한정 세일하던 화이트 면 티셔츠만 달랑 한 장 구입했다.


대신에 그는 분석적인 유형답게 자신이 착용해보고 마음에 드는 상품은 나중의 온라인 쇼핑을 위해 태그의 코드번호를 찍었다.



#4 “난생 처음으로 쇼핑이 재미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1차 쇼핑 일주일 후 나는 ‘301’군을 만났다. 다음 쇼핑에서 부족한 아이템을 추가적으로 구입하기 전 상담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연구실에서 밤새 실험하다 어렵게 시간을 쪼개서 나온 ‘301’군. 지난 번 쇼핑에서 뭔가 아쉬운 게 없었냐는 내 질문에 ‘301’군은 이런 말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1초간 잠깐 숨을 죽였었다) 아쉬운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아 이래서 여자들이 쇼핑을 좋아하는구나!’를 느꼈습니다. 선배님께 스타일링 법칙들을 배웠고, 그날은 배웠던 것들을 처음으로 적용시켜서 실행에 옮겨보는 시간이었던 거죠.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배움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저는 쇼핑이란 게 난생 처음으로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원래는 쇼핑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보통은 가족들끼리 우르르 가죠. 그 때 옷을 입어보는 것, 솔직히 정말 귀찮았죠. 시간낭비 같아서 어쩔 때는 마네킹에 걸린 게 괜찮아 보이면 그대로 다 구입하기도 했었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옷을 고르고 내가 옷을 입어보는 그것이 하나도 귀찮지가 않았어요. 제가 배운 이론을 실습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아, 이런 식으로 쇼핑하는구나!’를 배운 시간이었어요.”


사실 그는 여자들의 쇼핑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쇼핑을 좋아하는 이유는 법칙을 적용하는 재미를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를 위해 돈을 쓴다는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게 쇼핑하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하는지 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나보다.


어쨌거나 시간 낭비 극도로 꺼리는 탐구자형 인간인 ‘301’군이 쇼핑에서 흥미를 느꼈다니. 탐구자의 호기심의 대상에 패션과 쇼핑을 포함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아 내 나름대로 뿌듯했다.


‘301’군은 쇼핑할 때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 팁인지 피부로 체감했다고 한다. 집에 가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며 홀로 분석하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한편 다시 패션 앱에서 토털룩 사진을 스스로 분석하면서 어떤 아이템이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지도 더 점검하기도 했단다.


그 결과 ‘301’군은 우리가 여의도 쇼핑몰 팝업 스토어에서 찜했던 A브랜드의 화이트 스니커즈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더 저렴하게 주문했고, 망고 치노 팬츠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을 이용하여 구입했으며, 지오다노에서 입어봤던 스트라이프 스웨터를 어머님께 선물로 받기도 했다. 샘소나이트에서 착용해 본 가방은 직구하기로 했고,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아 안경은 몇 달 뒤에 구입하기로 했다고.


그리고 여백미를 주기 위한 필수 아이템으로 내가 강력 추천했던 유니끌로 화이트 티셔츠를 지난번 쇼핑 때 사가지고 귀가했더니 어머님께 대단히 칭찬을 많이 들었다며, 한 장 더 구입했단다.


과거에 그는 그런 화이트 티셔츠가 왜 필요한지 몰랐다. 그러나 내게 법칙을 배우고 패션앱의 토털룩 사진을 보며 그 법칙을 반복해서 복습할수록 그런 기본 아이템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엔 모르는 브랜드라며 극도로 꺼렸던) 화이트 스니커즈는 신어보니 착용감이 좋아 정말 잘 산 것 같다며 연신 자랑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기본 화이트 셔츠를 구입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며 꼭 구입하겠다고 했다.


나는 지난 쇼핑을 돌아보며 고가의 브랜드에서 시계를 구입하고자 했던 ‘301’군에게 샤넬백에 관련된 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나는 학과 교수님 모친상에 샤넬백을 메고 문상을 간 적이 있다. 그 때 대학원 후배들은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샤넬백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비싼 가방 멘 어려운 선배’로 인식하는 그 상황이 내겐 너무 불편했다.


어떤 고가의 아이템이 매우 유명할 경우, 사람들은 내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하기보단, 그 아이템의 가격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자 ‘301’군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며 털어놨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더 확신을 갖고 해줬던 말.


내 모습이 멋져보이려면, 가격이 읽히지 않는 아이템을 착용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감각 있는 멋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나와의 소통을 즐거워한다. 그랬더니 ‘301’군이 답한다.

“딱 그 파슬(Fossil) 시계가 그런 시계네요!”



#5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게 많아서 두렵습니다.”



이런 저런 바쁜 일정에 쫓기는 시간을 보냈던 ‘스키어 301’군과 보충 쇼핑을 위해 다시 만났다.


‘스키어 301’군과 쇼핑 중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가 여전히 어떤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음을 느꼈다.


탐구자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완전히 안다’라고 느낄 때까지는 일단 의사결정을 미룬 채 ‘두렵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실제 행동을 개시하기에 앞서 숨어서 눈만 내놓은 채 대상을 관찰하려는 경향이 있다.


중간 중간 메신저로 ‘스키어 301’군에게 필요한 아이템이 세일할 경우 사이트 주소 링크를 보내주기도 했었는데 그는 그 동안 내가 보내준 링크를 보기만 했다. 내가 알려준 코트의 반짝 세일도 다 지나고 ‘301’군의 사이즈는 이미 재고가 없었다.


왜 구입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돌아오는 답.

“제 사이즈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브랜드마다 어떤 건 L이 맞고, 어떤 건 XL가 맞습니다.”

그는 잘못된 사이즈를 선택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사이즈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땐 두 개의 사이즈를 모두 구입한 후 맞지 않는 것을 반품하면 된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오프라인 매장에 갈 여유가 없을 땐 반품 택배비용을 부담하는 쪽이 시간 절약을 위해서나 사이즈 미스를 두려워하느라 좋은 상품 놓치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런 ‘두려움’을 확인시켜주는 ‘스키어 301’군의 재밌는 습관이 하나 있다. 그는 외투를 꼭 맞게 입으려는 경향이 있다. 왜 덩치에 맞지 않게 100사이즈를 고집하느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블레이저를 딱 맞게 입고 정말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그는 모든 외투를 딱 맞게 혹은 심지어 작게 입는 습관이 생겼다. 나와 만나는 기간에도 그는 제 덩치에 맞지 않게 작은 후디스 집업 점퍼를 입고 나오기도 했다. 동생 옷 뺏어 입고 나온 모습 같다고 놀렸는데, 내 말에 매력적인 목소리로 ‘허허허허’ 웃으면서도 자기의 ‘안다’ 속 고정관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날 나와 쇼핑할 때도 덩치에 안 맞는 작은 사이즈, 키에 안 맞는 짧은 외투에 대한 집착을 종종 드러내어 나의 웃음을 자아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그의 키에는 적당히 긴 기장의 코트 혹은 야상 코트가 잘 어울렸는데 짧은 것만 보면 일단 걸쳐보는 모습. 참 재미있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나는 ‘스키어 301’군에게 참고하라고 어느 날 까페에서 내가 도촬한 멋진 중년남성 룩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사진 속 남자 분은 내가 평소 중시하는 여러 법칙들이 적용된 룩을 입고 계셔서 그런지 정말 멋있었다.


그는 그 룩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보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여러 번 재촉했다. 그 모습도 재밌다고 생각했었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그 날도 그 사진 얘기를 하며 그 룩은 그대로 카피하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가장 멋진, 그리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룩이라 두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스키어 301’군은 나를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단다. 어서 말해보라고 했더니 가을과 겨울에는 댄디한 스타일링에 대해서 배웠으니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느낌인데 여름이 문제란다. 그 특유의 저음의 보이스로 이렇게 말한다.

"선배님, 여름 스타일링은 따로 배워야 하나요? 여름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라 두렵습니다. 저에게 여름옷은 아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어요."


지난 쇼핑 때 ‘301’군에게 ‘여름 마이’가 필요하다던 게 기억이 났다. 나에게 배운 법칙들을 적용시켜서 만들어본 룩이 슬랙스/데님 + 셔츠 + 스웨터 + 블레이저 룩이 대부분이라 여름에도 데님 + 셔츠 + 스웨터는 생략 + 블레이저를 입는 방법 밖에 모르겠단다. 그래서 ‘여름 마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내가 웃으며 답했다. 여름옷 역시 내가 가르쳐줬던 ‘법칙’들을 잘 적용하면 된다며 간단한 팁들을 알려줬다. 그에게 여름옷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그 동안 옷장 정리도 해보고, 쇼핑도 하고, 학회 참석을 위해 댄디한 스타일링도 직접 해보면서 가장 유용했던 법칙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반대의 법칙’ 그리고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을 들었다. 두 법칙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서 반복해서 읽고 나서 ‘아 내가 이런 문제가 있었구나’ 라고 느꼈다.


어떤 문제였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

“제가 이전에 좋아했던 것들은 다 디테일이 있는 것들이었어요. 청바지는 워싱 들어간 거, 티셔츠는 글자 들어간 거. 티셔츠를 원색으로 입은 적도 있습니다. 오늘 신은 신발처럼 신발도 하다못해 포인트 들어가야 되고. 이제 그런 것들이, 물론 하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한 개 씩만 들어가야 되는 걸 아는 거죠. 그게 생각보다 (스타일리쉬한 룩에) 적용이 꽤 잘 되는 것 같아요. 거기서 제가 깨달은 게 있는데 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티셔츠는 다 버려야겠더라구요.”


‘현상’ 수준에 머물러 있던 그의 ‘안다’의 수준이 짧은 컨설팅을 통해 갑자기 ‘법칙’ 단계로 격상될 리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무리 뛰어난 족집게 과외 선생님에게 배운다 하더라도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려는 학생의 연습과 훈련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지식은 학생 본인의 것이 될 수 없으니까.


‘스키어 301’군은 이제 쇼윈도 속 마네킹의 룩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은 패션이 자신의 탐구의 대상 범위에 확실히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마네킹이 입은 스타일링이 맘에 들면 들어가서 만져 보게 되고,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된다고.


그는 아직도 두려운 상태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스타일링의 ‘안다’의 수준이 ‘현상’ 수준에서 ‘법칙’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임을, 여러 가지 시도와 도전이 ‘두렵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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