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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24. 2017

난 나를 홀리는 옷을 입는다

진정한 섹시함의 원동력

#1 하이힐의 첫 경험


대학생이 되며 나는 처음으로 하이힐이라는 걸 신어보게 되었다. 비록 앞코가 둥근 통굽의 구두였지만, 굽 없는 신발만 19년 동안 신어온 내게 8cm 힐은 약간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이힐. 그것은 몇 년의 인고(?)의 기간을 지나 비로소 멋이 허용된 나를 설레게 했던 어떤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하이힐은 참 불편했다. 하이힐을 신고 내가 걸어 다녀야 했던 장소는, 잘 닦여진 평지에 지어진,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순식간에 이동 가능한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산을 깎은 후 동일한 도면으로 지어놓은 건물로 가득한, 하이힐 신은 여학생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학교였다. 나는 그 덕에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내려가다 굴러 다치는 굴욕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하이힐을 포기하기 싫었다. 그래서 멋내기라는 새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빠르고 큰 보폭으로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자유를 헌납했다. 나는 하이힐을 신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 좁은 보폭을 유지하며 천천히 걸어야 했다.


립스틱을 바르고도 비슷한 행동이 필요했다.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으려면 음식을 맛있게 먹기보다는 조금씩 오물오물 먹어야 했다.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조심성이 요구되었다.


내가 나의 새로운 겉모습으로부터 깨닫게 된 여성스러움이란 불편한 옷차림과 메이크업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야 하는 조신함이었다.


그런 조신함과 상반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학교의 대다수 구성원이었던 남자들의 잔소리가 쏟아지면, 나도 모르게 욱 하는 반감이 생겼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나의 불편한 옷차림으로 인해서 내가 넘어져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2 History is Her Story!


이제 남성복은 여성들에게 흔한 아이템이 되었다. 보이프렌드 셔츠, 보이프렌드 코트, 밀리터리 재킷……. 특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남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남성복을 입는 이유는 조금 더 활동성을 확장시켜준다는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브리엘 샤넬이 남자 옷을 이리저리 변형했던 목적 중 하나는 여성의 몸을 불편한 옷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최근 여성 디자이너들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창조주 즈음으로 풍자되고 있다고 한다. 미우치아 프라다, 프리다 지아니니, 피비 파일로, 스텔라 매카트니같은 디자이너들은 드디어 진짜 여성을 위한 세계를 창조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셈이라고.


과거의 (남자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창조되어 왔던) 패션은 일종의 판타지나 컨셉에 불과했지만, 여성 디자이너들에 의한 현 시대의 패션은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이 입을만한 (wearable) 그 무엇이 되고 있다는 것.


남자 디자이너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줄 뮤즈를 찾느라 분주하지만, 여성 디자이너들은 자기 스스로로부터 영감을 받고 옷을 만든다. 그녀들이 만든 입을만한 옷은 멋스럽고 섹시하다. 그러나 그녀들의 옷은 남자 디자이너들이 표현한 섹시함과는 뭔가 달라보인다.



#3 자기됨으로부터의 관능


마릴린 먼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섹시한 여성으로 꼽힌다. 마릴린 먼로가 섹시하다는 건 어쩌면 '거기 신사분, 나를 봐요. 나와 섹스하고 싶죠?'를 묻는 듯한 그녀의 외양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녀는 실제로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혀짧은 발음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풍만한 가슴, 금발의 외모는 백치미에 열광하는 남성들을 유혹하기에 딱 맞는 이미지였다. 그녀의 관능은 다분히 외부지향적이다.


그녀의 관능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한 것 같다. 그녀의 이미지를 모방한 스칼렛 요한슨의 인기를 보면. 그러나 꽤 오래도록 미국에서 가장 섹시하다고 평가받았던(그리고 출연료가 가장 높았던) 여배우는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외부지향적인 섹시함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고도 아름답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안젤리나 졸리의 눈빛과 미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은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흡사하다.


천경자 화백은 젊은 시절 유부남과 지독한 사랑에 빠져 오랜 기간 동안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던 한나 아렌트, 오귀스트 로뎅과 사랑에 빠졌던 까미유 끌로델, 에드와르 마네와 사랑에 빠졌던 베르트 모리조,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원한 뮤즈 에밀리 플뢰게.


그녀들 모두, 자신의 삶을 주기에는 인색했던 남자와의 사랑에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다. 몇몇은 학문이나 예술로 자기애를 실현하고 자기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했지만, 그렇지 못한 몇몇은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천경자 화백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그 끝도 없는 사랑의 족쇄를 마침내 끊고 (물론 남자의 자살로 더더욱 마감될 수밖에 없었지만) 홀로 바로 서기 위해 스스로와 치열하게 싸웠다.  


천경자 화백이 그린 여성들은 남자의 보호와 사랑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그래서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아리만다의 그늘>에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강렬한 눈빛의 여성이 누워있다.


그림 속 여성은 어떤 옷도 입지 않았지만 누구를 유혹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혼자만의 에덴동산에서 홀로 행복하다.


그녀는, 그런 그녀로부터 남성에 대한 도발이나 위협을 느끼기보다는 그녀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하고자하는 누군가를 조용히 초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의 세계는 굳이 누군가가 와달라고 꾸며놓은 공간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아이들을 입양하고 유엔 친선 대사로서 살아가는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남을 위한 섹시함의 종착점


지금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로 꼽히는 마릴린 먼로. 그녀의 실제 삶은 불행했다. 열등감 때문에 책과 음반을 수집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그 상처를 극복하기 보다는 섹시함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철저히 숨겼다.


두 번의 이혼 끝에 <세일즈맨의 죽음>의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4년 만에 끝났다. 아서 밀러는 먼로를 정서적으로 지지하고 보살펴줬지만, 둘은 수평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아버지와 딸 같은 보살핌과 의존의 관계로 소통했다.


밀러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녀는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소녀와 대중의 섹스 심벌 사이에서 그녀는 극도로 불안정했었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여 그것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아서 밀러는 죽기 직전 먼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던 여자는 ‘마릴린 먼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살아야 했다. 우리의 결혼은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죽였다.”


마릴린 먼로는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에 갇혀 외롭고 상처투성이였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불행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야 했다.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인 그녀의 섹시함은 정작 스스로에게는 독이었던 것 같다.



#5 매니쉬룩과 페미닌룩 사이 어딘가


나는 패션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고가는 다양한 공간에서 '여성스러움'의 혼돈을 마주한다. 남자들의 보호를 바라거나 남자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충족시켜줄 과거의 여성스러움으로의 회귀와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여성스러움으로의 나아감 사이의 혼돈을.


특히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 설명'에서 그 딜레마는 극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여성의 가녀림 혹은 섹시함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옷이라는 설명과 남성복에서 특정 요소를 차용해왔기 때문에 세련되고 멋있는 옷이라는 설명이 하나의 쇼핑몰에 공존하니까.


그러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줄 옷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제한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려다 그 판타지에 갇혀 스스로이지를 못했던 마릴린 먼로,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않고도 아름답고 아이들과 행복한, 그리고 헐리우드 최고의 출연료를 받기까지 하는 안젤리나 졸리를 떠올려 보니.


'다소곳한 여성'으로 나를 위장시켜줄 옷, 혹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관능적인 모습으로 나를 꾸며줄 옷. 이런 옷들은 (본의 아니게)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할 여성이라고 말해준다. 내가 하이힐을 신고 나를 붙잡아 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처럼.


물론 통상적 의미에서 '여성스러운 옷'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모든 옷이 내가 아닌 어떤 이미지를 연기하도록 하는 옷이라면, 그건 불행한 연기자가 아닌 행복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나에게 결코 플러스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혼자서 온전히 나를 바로 서게 해줄, 그래서 아름다운 옷이 반드시 매니쉬룩 혹은 남성적인 그 무엇과 가까운 지점에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긴 길이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나같이 키 작은 여성에게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아이템이며, 징박힌 바이커 재킷은 나조차도 찔릴까봐 무서운 흉기같아 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양자 사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최상의 아름다움, 혹은 섹시함을 선사해줄 옷이 존재하는 걸까?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하이힐을 신으면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가던 출발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범했던 귀여운 실수였던 것 같다. '이 지점 즈음에 있으면 내가 매력적인 여성이 될까?'라고 가늠하며 범했던 실수.


과거의 상처를 바라보고, 그것을 극복하려 지금껏 노력해온 나는 이제 그 어느 지점에 내가 있어야만 매력적인 여성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어느 날부터 매니쉬룩과 페미닌룩 사이에 존재하는 스펙트럼을 초월했다고나 할까.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굳이 갈망하지 않더라도, 굳이 이성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관능을 극대화하도록 나를 꾸미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내 스스로 삶을 견뎌낼 수 있다는 믿음.


 '나는 평생 나 자신과 결혼했다'는 나를 향한 사랑

이런 나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아리만다의 그늘> 속 여성처럼 나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적당한 높이의 통굽의 부츠를 신고, 투박한 셔츠를 입고, 무색에 가까운 립밤을 바르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늘리지 않고도 내가 당당한 이유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디자이너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패션 아이콘이 된 이유는 스스로의 세계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니쉬룩과 페미닌룩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디자인을 가두기보다는 여성 스스로 그 옷을 입고 얼마나 활동하기 편하면서 아름다운지에만 집중했다.


스스로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할 때, 그리고 스스로의 세계가 확고할 때 여자는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이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기꺼이 땀흘려 운동을 하며 즐거움을 경험하는 여자,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 굳이 남성들에게 맞서려고도, 남성들에게 보호받으려고도 하지 않지만 스스로로 부터 사랑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 빛나는 여자.


그런 여자가 자신을 낮추지 않고도 타인으로부터 기꺼이 사랑을 받을 자격도 있는 관능적인 여자이다. 안젤리나 졸리처럼. 그래서 내겐 나를 홀릴 수 있는 옷이 가장 섹시한 옷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룩 중 하나이다. 굳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기보다는 내가 찾아낸 스타일링 법칙을 적용하여 내게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 난 살아있음을 느낀다.



#6 나를 홀리는 섹시함


나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20대 초반 소녀들(그리고 소년들도)이 미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기도 전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관능을 강요당하는 모습이 불편하다. 그리고 그녀들의 메이크업과 옷차림을 따라하려는 또래 소녀들의 관능에 대한 선망 역시도.


그녀들이 타인을 위한 관능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스스로의 상처와 열등감까지 포장해 버릴까봐, 그녀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 누구와도 수평적인 소통과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까봐 나는 걱정스럽다. 다수의 시선을 훔쳤으나 끝까지 아팠던 마릴린 먼로가 떠올라서.


타인을 위한 관능에 너무도 많이 노출되다보니 남자들은 여성들의 옷차림에 늘 말이 많다.


'누굴 홀리려고 그렇게 입었냐?'


이런 질문은 여성에게 외부지향적 관능만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힌 참 유치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누구긴 누구? 나지.






p.s. 이 글 쓸 때만 해도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사이가 좋았는데, (둘이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그렇게 된 걸 보면) 안젤리나 졸리는 정말 혼자의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여성인가 봅니다. 더 좋은 예가 있으면 다른 인물로 바꾸고 싶지만 일단 제가 유명인에 대한 지식이 짧은 관계로 글은 이렇게 놔둡니다.







['건강한 의생활'  패션힐러 최유리의 '오늘 뭐 입지?']

1부. 알짜 기본 아이템 스타일링 방법

2부. 옷장 속 잠자는 옷 살리는 스타일링 방법


[정체성, 옷 입기, 쇼핑 컨설팅 신청]

[최유리 블로그]

[최유리의 패션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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