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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의 인사이트 May 27. 2021

신라 고분 속 이국적 유리그릇.
왜 무덤에 묻혔을까

보물 제628호 '천마총 유리잔'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인 경주 천마총에서는 1만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됐다. 금관을 비롯, 천마총이란 이름을 낳은 유물이자 신라시대 회화인 '천마도'도 그중의 하나다. 1973년 발굴 당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유물은 또 있었다. 온전한 형태의 짙은 푸른색 유리잔. 한눈에 봐도 '신라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1975년에는 천마총 인근 황남대총이 발굴됐다.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표주박처럼 붙은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중 가장 크다. 금관이 나온 황남대총 북쪽 무덤(북분), 은관이 나온 남분에서도 유리병과 잔들이 발굴됐다.


로마나 페르시아 유물 같은 유리그릇들이다. 특히 남분에서는 국내 유일한 형태의 유리병이, 북분에서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유리잔이 출토됐다. 이국적인 유리그릇은 천마총, 황남대총만이 아니라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등에서도 나왔다. 모두 많은 껴묻거리(부장품)을 묻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의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들이다. 이들 고분에서 나와 복원된 유리용기만도 20여점이다. 이 유리그릇들의 상당수가 서아시아나 지중해 주변에서 온 것으로 분석된다. 로마제국기에 성행한 '로만글라스'의 후기 모델(4~5세기 말)이거나 로만글라스를 장식적 측면에서 업그레이드한 서아시아 사산조 페르시아(3~7세기)의 '사산 글라스'다.


로만글라스와 사산글라스가 나온 신라 고분들은 모두 5~6세기에 조성됐다. 그렇다면 1500여 년 전에 저 먼 서역의 유리그릇이 신라까지 온 것이다. 신라만이 아니다. 금동대향로' 출토로 유명한 백제 유적인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도 서역 유리그릇의 파편들이 확인됐다. 학술적으로 이 유물들은 삼국시대에 한반도와 지중해, 서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문물교류를 실증한다. 나아가 전시장에서 만나는 자그마한 유리잔과 병에는 1500여 년 전 '유리 대장정' 이야기가 담겨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국보 제193호 '황남대총 남분 유리병'

인류가 유리를 만든 것은 4000여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문헌으로는 로마의 플리니우스(23~79)의 저서 <박물지>에 보인다. 폼페이를 뒤덮은 베수비오 화산 폭발 목격담으로도 유명한 그 플리니우스다. <박물지>는 기원전 1300년 전후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활약한 페니키아 상인들이 식사를 준비하던 중 소다 덩어리가 녹아 모래와 섞이면서 유리가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고고학적 유물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이집트에서는 유리제 기원전 4000년쯤에 등장한다. 이라크의 기원전 2300년경 유적에선 유리 덩어리, 구슬이 발굴됐다. 잔이나 병 같은 유리용기도 기원전 1500여 년 전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적에서 보인다. 본격적인 유리그릇 제작은 기원전 100년 전후쯤으로 본다. 이른바 '대롱불기' '유리불기'라는 유리 역사에서 중요한 제작기법이 발명된 것이다. 지중해 동쪽 연안의 장인들이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기법은 금속관 끝에 액체화된 유리를 묻혀 숨을 불어내 다양한 형태의 용기를 만든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제작술이다.

제작술이 발전하면서 두껍고 불투명한 유리는 투명하고 얇으며 기포나 불순물이 적어 보다 실용적인 제품으로 진화됐다. 로마제국의 확장과 함께 유리도 성행했고, 사산왕조 페르시아 때는 용기의 표면을 연마해 다양한 무늬를 만드는 등 이른바 '커트' 장식이 이뤄졌다. 지중해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유리 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동쪽으로는 중국,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이른다. 전통적으로 옥을 숭산한 중국의 경우, 유리의 기원을 놓고 주장이 엇갈리지만 서역보다 늦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유리용기의 성분을 분석해 '소다 유리'라면 서역을, '납 유리'라면 중국을 원산지로 본다.


백제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 유리잔

한반도에서도 유리제 유물은 기원 전후부터 나타난다. 기원전 2세기의 부여 합송리 유적에선 납 성분이 포함한 유리로 만든 대롱옥이, 기원전 1세기쯤의 김해 양동리, 창원 다호리 유적 등에선 유리구슬이 발견됐다. 그런데 구슬보다 높은 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는 유리그릇은 삼국 중 신라에서 유독 많이 출토된다. 천마총 유리잔'(보물 628호), '황남대총 남분 유리병 및 잔'(국보 193호)이 대표적이다. 천마총 유리잔은 높이 7.4cm로 짙은 푸른색을 띠며 투명하다.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이물질도 있지만 투명도가 높고 기포도 없는 등 제작 수준이 높은 편이다. 표면의 거북등 무늬는 대롱불기 기법으로 유리액을 무늬가 새겨진 틀 속에 불어넣어 찍히도록 한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유리병은 연한 녹색의 달걀 모양 몸체에 금실이 감긴 푸른색 손잡이가 있다. 금실은 당시 유리병이 매우 귀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병의 입은 새 주둥이 모양으로 오므라져 빼어난 형태미와 함께 물, 술을 따를 때의 기능성도 높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노코에'라는 그릇에 기원을 둔 이 같은 병은 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나 로마, 터키 등에서 많이 제작됐다. 입 모양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해 '봉수(鳳首)형 유리병'으로도 불린다. 이 병은 문화재 복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한다. 발굴 당시엔 180여 조각으로 발견돼 지금 같은 모양의 병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다. 1980년대 조각들을 조합해 1차 복원을 했고,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재복원에 나서 높이 25cm의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삼국시대 유리용기는 이 밖에 나뭇결무늬에 갈색을 띠고 굽이 달린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 624호)을 비롯, 가야시대인 합천 옥전고분군 등에서도 발굴됐다. 백제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유리 파편들은 '소다 유리'계통 이어서 서역산으로 추정된다. 특히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나라(奈良)의 쇼소인(正倉院)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잔이 백제로 건너와 은제 다리가 접합된 후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유리잔도 있다. 유리그릇은 불교 사리장엄으로도 많이 쓰였다. 사리장엄 유리병으로는 칠곡의 '송림사 오층전탑'과 익산의 '왕궁리 오층석찹'등에서 나온 유리병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 유리 문화는 자기로 대체되면서 쇠퇴하게 된다.


보물 제325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신라 땅에서 발견된 서역의 유리그릇들은 아직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로만 글라스, 사산 글라스로 보이지만 그 원산지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어떤 경로로 누가 신라까지 갖고 왔는지. 왜 신라의 최고 지배층은 이들 유리 그릇을 무덤에 묻었는지, 이 그릇들에 대한 신라인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무엇보다 이들 유리그릇이 모두 수입품일까. 신라가 자체적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라는 물음도 가능하다. 일부 그릇의 경우 신라가 자체 생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기원 전후 곳곳의 유적에서 많은 유리 구슬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또 금속 공예품에 유리공예 기술을 접목시킨 사례도 많다. 특히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유리잔 등의 경우 양식적으론 로만 글라스, 사산 글라스이지만 신라에서 제작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꾸준히 제기된다.


유리그릇을 둘러싼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서역 수입품이라는 근거가 자체 제작 가능성을 보여주는 근거보다 많고 설득력도 있다. 5~6세기 유리그릇 제작에 필수적인 도가니를 비롯한 각종 도구, 공방지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구나 공방지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 시기가 일러야 6세기 후반, 7세기 이후라는 게 주류 학설이다. 신라의 자체 유리그릇 생산은 이르면 6세기 말, 일반적으로 7세기 이후라는 것이다. 양식이나 성분 분석에서도 서역산일 가능성이 높다. 지중해와 서아시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전파경로도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주류 학설은 5~6세기 신라 왕릉급 고분 속의 유리그릇들은 일부가 신라의 자체 생산품일 수 있지만 대다수는 수입품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로만. 사산 글라스는 어떤 경로로 신라에 이르렀을까. 당시 동서양 문물의 핵심 교류 통로인 실크로드가 우선 꼽힌다. 또 북방의 초원지역을 통과하는 초원로(스텝로드)나 바닷길도 '유리 대장정'에 활용됐을 것으로 본다. 상상력을 좀 더 넓혀보면, 유리그릇들이 직접 신라로 운반됐을 수도 있고, 서역의 유리 장인들이 신라로 와 제작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서역 유리그릇을 둘러싼 많은 궁금증이 있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도 있다.


1500년 전 신라 왕실에서 서역 유리그릇들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고 지배층의 왕릉급 무덤에서. 금관 등 당대 최고 수준의 껴묻거리와 함께 발견된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실제 중국의 <후한서>,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서도 귀하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엔 일상생활용이기보다는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위세품, 장식품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유라시아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 먼 거리를 가로지른 유리그릇들은 1500여 년 전 동서양의 활발한 문화교류 상황을 잘 드러낸다. 신라의 대외적 개방성도 읽을 수 있다. 신라 문화는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이 낯설고 이국적인 유리그릇들로 한층 풍성해 보인다.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한 시대의 문화는 결국 서로 다른 문화, 문물이 만나 몸을 섞을 때 비로소 발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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