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렛 에크보(Garrett Eckbo, 1910~2000)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경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고 40년 가까이 일관되게 과학적 조경디자인 이론을 추구했다. 에크보의 조경디자인 이론은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일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1920년대 유럽에서는 르 꼬르뷔제(Le Corbusier)를 중심으로 현대건축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조경분야에서도 런던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인 크리스토퍼 터나드(Christopher Tunnard)를 중심으로 전통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현대의 요청에 의해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능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조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터나드는 훗날 하버드 디자인대학(1938~1943)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새로운 운동의 파장은 터나드와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근대건축과 디자인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에 의해 하버드대학교에 수혈된다.
그로피우스는 건축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을 전함과 아울러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미국인의 맥락에서 가르쳤는데, 에크보는 그 당시 그로피우스 밑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로피우스의 가르침에 의해 에크보는 사회와 공간 디자인(spatial design)과의 관련성을 인식하며, 조경디자인은 장소가 항상 인간의 삶과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좋은 디자인은 과학이며 예술이다. 과학은 인간관계를 분석해 주고, 예술은 인간 활동을 문화적 주제로 조화롭게 해 준다는 그로피우스의 주장은 이후 에크보 작품 활동의 나침반이 되었다. 이때 터나드는 조경이 건축과 달리 근대 예술과 함께 사회적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적 예술이어야 하고, 조경설계는 이성과 역사문제의 해결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미 옴스테드 이후의 전통적 조경에 식상해 있던 에크보 등에게 있어서 기능주의는 가장 중요한 조경디자인 이론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의 근대 디자인 운동은 에크보가 조경가로서의 활약을 약속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 결과는 많은 자유스러운 작품들과 에크보식 조경이론의 완성으로 나타났다. 에크보의 조경이론은 사물에 관한 해결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한 중심축이나 개념을 밝히는 데 있었다. 기존의 교조주의적 How-To론(형태에 집착한 기술론)에 기반을 둔 조경디자인 이론은 의미가 없었고 전통적인 옴스테드 스타일 조경과 단절함으로써 에크보식 조경디자인 이론에 도달했다. 에크보는 현대 경관디자인의 지침을 제시한 『Landscape For Living 삶을 위한 조경』의 머리말에서 논쟁의 회피와 이성적 무관심이 1940년대와 50년대의 『상아탑』적 도락(道樂)을 허용했다고 주장하면서 격렬한 어조로 종래의 전통을 고집하는 당시의 조경계를 비판했다.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 건축과의 합성이었던 때가 실제로 과거에 있었지만 그와 같은 의미의 조경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디자인이 앞으로 조경의 중심적인 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디자인과 계획과의 차이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조경디자인은 이용과 즐거움을 창조하기 위해 조경 디자인요소에 의식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면서 현대문화의 틀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인류가 처음으로 집을 짓고 농경을 시작한 이래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디자인은 인간과 대상물 사이의 3차원적인 질서의 부여이며, 계획은 2차원적인 추상화라고 정의하였다.
디자인과 계획의 개념의 개념과 인간과 물질 사이의 관계가 공통성이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디자인이 3차원적(시각적, 공간적), 계획은 2차원적(추상적, 평면적)인 것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에크보는 조경디자인의 목적은 단순히 외부공간을 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만이 아니다. 조경디자인이 추구하는 시각영역을 가능한 한 넓히려는 욕망은 항상 부지 경계선에서 절단되어버린다는 이야기 하면서 실제 조경디자인이 항상 욕구와 현실의 상호모순 내에서 전개하는 작업임을 인식시켰다.
그의 역사관은 영국 풍경식 정원은 풍경에서 인간과 자연의 융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백성과는 동떨어진 상류계급 인간과 경관 사이에서 상대를 합리적인 계약 관계 대신에 서로의 정감(情感)에 호소하여 원칙 대신 위안과 이해 등의 온정으로 대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당시의 사회는 아직 자연풍경과의 융합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융합을 초래할 객관적 조건이 처음부터 확립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의해 서로 벽이 없는 관계가 인간 사이에 성립될 때,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잘 엿볼 수 있다.
에크보는 경관과 사회상태의 균등한 발전의 필연성을 시사하고, 진정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 사이의 제반 관계가 민주적이고 평등해지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음이 일관되었다. 1969년 에크보가 저술한 『경관론, The Landscape We See』이란 책이름에서 잘 볼 수 있다. 조경의 목적이 왕이나 귀족계급과 같은 특정 집단이나 소수를 위한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민주 시민을 위한 경관을 창조하는 데 있음은 현대 조경과 조경 전문가, 심지어는 일반 사회에서 경관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