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낡은 현실에 덧입힌, 그림이라는 예쁜 거짓말
나는 우리 집 부엌이 싫었다.
유행 지난 팥죽색 타일, 벗겨진 수납장…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모델하우스 같은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이 낡음을 감추고 싶었다.
리모델링을 할 여유는 없었고, 대신 내가 제일 잘하는 '그림'으로 이 공간을 바꿔보기로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켜고 부엌을 선으로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낡아서 싫었던 흠집 난 붉은 법랑 냄비가, 그림으로 그리니 꽤 멋진 오브제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은 예뻤지만, 뭔가 부족했다. 너무 매끈해서 거짓말 같았다. 진짜 우리 집 부엌은 겉은 멀쩡해 보여도 문을 열면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지는 곳이니까. 그래서 나는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기로 했다. 왼쪽에서 보면 깔끔한 부엌이지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숨겨둔 살림살이가 다 보이는…
이것은 나의 공간에서 시작해 친구, 부모님, 그리고 누나의 집으로 이어지는 '공간 기록'이다. 겉모습과 속사정 사이, 그 틈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이제부터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