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을 비워낸 자리에 비로소 그림이 채워질 때

[나의 식탁] 가장 소란스러운 부엌 속 가장 ‘조용한 공간’

by 기록가 레이

보통의 식탁은 소란스럽다.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 찌개가 끓는 냄새, "오늘 어땠어?" 하고 오가는 대화들.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가장 뜨겁고 분주한 장소다.

하지만 밥그릇이 치워지고 행주질이 끝난 오후 2시, 혹은 모두가 잠들기 전 밤 10시.

나의 식탁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모한다. 배를 채우는 곳에서, 마음을 비우는 곳으로.

이번 작품은 그 고요한 '쉼(Rest)'의 시간을 담았다.



렌티큘러의 왼쪽 시선은 '여백'이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깨끗한 원목 식탁. 그리고 그 뒤 벽면에는 내가 수작업으로 그렸던 <조용한 공간>이라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내가 가장 공들였고, 가장 아끼는 그 그림. 그림 속의 고요한 풍경이 현실의 식탁 위로 흘러내려, 이곳이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사색의 영토임을 선포한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면, 그 여백 위에 '온기'가 채워진다.

화려한 만찬 대신, 소박한 티팟 하나와 머그컵 두 개가 놓인다. 찻잔 속에서는 구수한 작두콩차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금 쌩뚱맞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오브제 하나가 놓여 있다.

돌돌 풀려 헐거워진 두루마리 휴지 하나.

지긋지긋한 비염 때문에 툭하면 훌쩍거리는 나에게 휴지는 식탁 위의 필수품이고,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차는 나를 위한 작은 처방전이다.

우아한 티타임에 낀 투박한 두루마리 휴지가 누군가에겐 옥에 티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 풍경은 '가장 나다운 휴식'의 완성을 의미한다.

훌쩍거리는 코를 닦아낼 휴지가 손 닿는 곳에 있고,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고개를 들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 <조용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

긴장할 필요도,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다.


이곳은 하루를 치열하게 싸우고 온 내가,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져 숨을 고르는 참호이자 안식처다.

작품 속 렌티큘러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한 공간>이라는 그림은 배경이 되었다가 현실이 된다.

밥을 먹여 육체를 살찌우는 식탁도 중요하지만, 차를 마시며 영혼을 쉬게 하는 식탁 또한 우리에겐 필요하다.

줄어가는 휴지 롤만큼, 나의 피로도 스르르 풀려나가는 곳.

이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한, 식탁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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