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아두고 싶었던 문을 용기 내어 열었을 때

[에필로그] 낡은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가장 사소한 각도

by 기록가 레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 프로젝트를 '도피'로 시작했다.

유행 지난 체리색 몰딩이 싫었고, 칠이 벗겨진 수납장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현실의 부엌 위에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디지털 가림막을 쳤다. 매끄러운 벡터 선과 예쁜 색감으로 덮어버리면, 나의 구질구질한 일상도 조금은 그럴싸해 보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렌티큘러(Lenticular)'라는 안경을 끼고 보니 비로소 진짜가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보았던 완벽한 그림(Persona)은 사실 오른쪽의 투박한 현실(Reality)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설거지감이 쌓여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열심히 먹고살았다는 증거였고,

친구의 카페가 텅 비었다는 건 한때 그곳이 그만큼 뜨거웠다는 반증이었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타인의 공간을 훔쳐보며(Zoom-in) 많은 것을 배웠다.

세련된 새 소파와 촌스러운 뽀로로 변기가 뒤섞인 부모님의 거실에서 '사랑의 공존'을 배웠고,

예쁜 그릇 대신 젖병이 가득한 누나의 부엌에서 '책임지는 삶의 숭고함'을 보았다.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가 굴러다니는 나의 식탁이, 사실은 나를 가장 편안하게 감싸주는 치유의 공간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닫힌 문 하나쯤은 품고 산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낡은 취향, 감추고 싶은 게으름, 혹은 아픈 기억들. 우리는 그것들을 상부장 깊숙이 밀어 넣고 굳게 문을 닫는다. 그래야 '완벽한 나'를 연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그 닫힌 문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용기 내어 열어보라고.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감추고 싶었던 그 낡은 잡동사니들이야말로, 당신이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의 나이테이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당신만의 고유한 패턴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린 매끈한 그림보다, 흠집 난 냄비와 짝짝이 컵이 놓인 당신의 진짜 부엌이 훨씬 더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그저 낡은 방 한 칸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당신이라는 우주가 숨 쉬고 있다.


나의 전시(그리고 연재)는 여기서 끝나지만, 당신의 공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어떤 각도인가?

부디 그곳이, 당신을 가장 닮은 편안한 풍경이기를 바란다.


[감사의 말 & 다음 스텝 예고]

그동안 <남의 집 찬장을 훔쳐보는 마음>을 들여다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틈새(Layer)를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예정입니다.

당신의 소중한 공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면, 언제든 저에게 문을 열어주세요.

Insta. @layer.0421

Writer. 레이(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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