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정자 정원 옆을 걷다가 눈을 멈췄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맑게 피어 있던 세 송이 꽃.
칸나, 남천, 그리고 원추리. 이름도, 꽃말도 익숙했지만 왠지 오늘은 그 꽃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열정과 고마움,
행복과 전화위복,
사랑과 망각…’
유리는 조용히 그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꽃들… 나를 닮았구나.”
햇빛을 닮은 칸나가 벽을 등지고도 당당하게 피어 있었다. 그 안에는 처음의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용기가 있었다.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는, 늘 하루를 열었던 자신의 마음이 그 꽃과 닮았음을 느꼈다.
바람이 스치자 남천의 잎이 조용히 흔들렸다. 소란 없이 견뎌낸 시간. 작은 흔들림 뒤에야 피어나는 단단한 평안. 유리는 문득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불행 같았던 순간들이 뒤늦게 복이 되어 돌아왔던 일들.
‘행운은… 고요한 가지 위에서 자라는 걸지도 몰라.’
노란 원추리가 해 질 무렵 조용히 피어 있었다. 그 하루만 피는 꽃이 조금은 안쓰럽고, 또 아름다웠다.
슬픔을 잊는 데엔 시간보다 ‘누군가의 공감’이 더 필요했던 시절. 유리는 조용히 꽃을 바라보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하루만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피어나는 꽃이었으면 좋겠다.’
그날 저녁, 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아침에 묵상한 민수기 7장을 펼쳤다.
열두 지파 족장들이 차례로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장면. 하나같이 동일한 수량, 그리고 하나도 빠지지 않은 기록. 그런데 문득, 유리는 한 가지 궁금함에 멈추었다.
‘광야인데… 이 많은 예물은 다 어디서 났을까?’
잠시 눈을 감았다가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그들이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금과 은, 옷가지를 받아 나오게 하셨던 장면. 유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손에 필요한 것을 미리 채워주셨던 거였지…”
하지만 곧 다른 장면도 떠올랐다. 그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때. 같은 것을 가지고도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무엇을 가졌느냐보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더 중요했구나…’
유리는 다시 조용히 눈을 떴다. 그 마음은 곧 자신의 삶으로도 이어졌다.
늘 부족하다고만 여겼던 자신.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지혜도 멀게 느껴졌던 시간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마음을 따라 한 줄, 또 한 줄 적어가고 있었다.
“넘치진 않아도… 매번 꼭 살아갈 만큼은 주셨어요.”
꽃 앞에 멈춰 섰던 아침, 그리고 말씀 앞에 앉았던 저녁. 그 사이에 흐른 하루. 유리는 오늘도 가득하지 않아 더 따뜻했던 은혜 한 조각을 껴안고 천천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글: 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