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다림 속에 피어나는 정원

듀란타와 레몬트리, 그리고 믿음으로 자란 마음

by 산여울 박유리


이 글은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면서 쓴 글 입니다.



1) 꽃을 기다리는 나무, 듀란타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키우는 식물, 작지만 반짝이는 존재, 발렌타인 자스민(듀란타).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나는 이 아이의 꽃말은 “당신은 나의 것, 사랑을 위해 멋을 부린 남자”입니다.


이름부터 조금 특별하고, 향기까지 달콤해서 그런지, 왠지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이 아이는 떨기나무처럼 가지가 옆으로 퍼지며 무성하게 자랍니다. 꽃은 가지 끝에서 피어나기에 조금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우리 집 베란다는 작은 편입니다.

화분이 많고, 햇빛도 충분하지 않아 이 아이가 꽃을 피우기엔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하고, 가지도 길게 자라야 겨우 꽃망울이 맺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묵묵히 자라 줍니다. 이 아이는 주택에 살 때부터 키웠으니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생명력 하나는 참 좋습니다. 가지 하나를 꺾어 흙에 꽂기만 해도 뿌리를 내리고, 어느새 새순이 돋아납니다. 삽목이 잘되지만, 꽃은 쉽게 피지 않습니다.


옆의 다른 화초들이 많아서 조금만 커도 가지를 잘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딧물도 자주 생기지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그런지, 벌레들이 더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천연 살충제를 열심히 뿌려 보아도 그때뿐이라 결국은 또 가지를 자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며칠 전 잘랐던 가지들이 아직 자라는 중인데, 이번에는 그냥 자라도록 두기로 했습니다. 왠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자르기만 하는 이 모습이 제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햇볕이 부족한 자리에서도 묵묵히 잎을 내고, 다시 가지를 뻗는 그 모습이 참 뭉클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르지 않고,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아직은 충분히 자라야 하고, 햇빛도 더 많이 받아야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합니다. 진딧물도 줄었고, 식물성 기름과 주방세제를 조금 섞어 뿌려주니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젠 자꾸 약을 치지 않고, 그저 크게 자라 주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려 합니다.


꽃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단단한 잎이 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쁩니다. 오늘도 반짝반짝, 이 아이는 꽃을 기다리며 자라는 중입니다.



2) 오렌지 자스민 – 사랑의 기쁨


  사랑의 기쁨이 자라는 시간. 작지만 반짝이는 식물, 향기로도 으뜸인 오렌지 자스민. 이 아이는 두 해 전 우리 집에 와서 처음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꽃말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처음엔 작고 앙증맞은 모습이었지만, 꽃망울이 맺히자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조금만 스쳐도 떨어질까 봐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잎이 무성하고 줄기도 훌쩍 자랐습니다. 벌써 네 해째지만, 여전히 향기는 처음 그대로입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깊어진 듯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이름이 이 아이에게 참 잘 어울립니다.

오렌지 자스민은 꽃이 하루밖에 피지 않습니다. 매일 다른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그 향기가 늘 머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을 좋아해서 매일 챙겨 주고, 창가의 좋은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햇빛은 좋아하지만 너무 강하면 잎이 탈 수 있어서, 밝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두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 아이를 지금처럼 자라게 한 것 같습니다. 처음 꽃을 피웠던 해에는 베란다 문을 열기만 해도 향기에 취할 정도였습니다.


작은 잎 사이로 수줍게 핀 하얀 꽃이 기쁨의 향기를 퍼뜨렸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이 아이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도, 이 아이처럼 그렇게 자라왔는지도 모릅니다.


  물을 주며 지켜본 시간이 내 안에도 작은 변화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잎이 더 풍성해지고, 줄기마다 꽃망울이 하나둘씩 맺히고 있습니다.


이제 곧 또 한 번의 기쁨이 피어나겠지요. 꽃 한 송이는 하루뿐이지만, 마음에 머무는 향기는 오래갑니다. 매일 조금씩, 사랑의 기쁨은 다시 피어납니다. 그 작은 꽃 하나가 오늘도 제 하루를 환하게 밝혀 줍니다.

이 글을 쓸 때는 꽃이 많았는데, 지금 사진에는 또 꽃이 지고 없습니다. 1년내내 꽃을 피우고 지고 그렇게 반복하는 기쁨의 꽃입니다.



3) 레몬트리 이야기


이 레몬트리는 약 3년 전, 씨앗으로 발아한 나무입니다. 작은 화분에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목대가 굵게 자랐습니다. 크게 자랄 나무라 생각되어 1년 후 큰 화분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처음엔 물 조절을 잘 몰라서 물을 멀리 두고 키우다 보니 잎에 끈적한 액체가 생기더니 곧 검은 곰팡이처럼 변했습니다. 화분이 꽤 무거웠지만, 낑낑 소리를 내며 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샤워 분사기로 잎을 씻어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잎은 반짝이며 다시 예쁜 초록빛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가시는 어린 순 때부터 잘라 주어, 이제는 가시가 없는 레몬트리가 되었습니다. 물가로 옮긴 뒤부터 새순이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쁘게 자라서 언젠가 꽃이 피고 열매까지 맺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상상해 봅니다. “레몬트리야, 반짝반짝 예쁘게 잘 자라 줘서 고마워.”


요즘은 아들이 다이소에서 사 온 영양제를 화분마다 하나씩 쿡쿡 꽂아 주고 있습니다. 처음엔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꽂다 보니 ‘이 아이도, 저 아이도!’ 하며 모두 챙기게 되었습니다.

레몬트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조금은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며칠 지나자 잎은 윤이 나고, 새순은 기지개를 켠 듯 자라났습니다. 보이지 않게 뿌리가 자라듯, 제 마음에도 따뜻한 기운이 번졌습니다.


이 레몬트리와 함께 씨앗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몇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아직 어립니다.

누군가는 물방울을 머금고 반짝이고, 누군가는 가느다란 줄기로 햇살을 향해 조심스레 키를 재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넉넉한 땅 위에서, 또 다른 아이는 매달린 화분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천천히 자라나고 있습니다. 같이 태어났지만, 자라는 모양도 속도도 방향도 다릅니다. 그 모습을 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괜찮아. 누구는 먼저 자라고, 누구는 천천히 피어나니까.”

식물들을 기다려 주는 이 시간은 결국 나를 기다려 주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레몬트리의 꽃말은 성실한 사랑, 순수한 마음, 새로운 시작. 작고 단단한 씨앗에서 시작된 이 나무는 묵묵히 자라며 나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 성실한 사랑이 오늘도 반짝이며, 나의 작은 정원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3년 전 씨앗에서 자라 가장 먼저 크고, 가장 묵직해진 아이가 맏이입니다. 목대가 굵고, 잎이 넓고 짙어졌을 때 ‘이제 정말 나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잎에 끈적한 액이 생기고 검게 변했을 때는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화분을 물가로 옮기고 잎을 씻어 주자 며칠 사이 다시 반짝이는 초록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는 내게 늘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다시 예뻐질 수 있어.”


같은 시기에 씨앗에서 태어난 레몬트리 동생들이 있습니다. 같은 시작점이었지만, 자라는 속도와 모습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통통한 잎으로 초록빛을 뽐내고, 누군가는 가느다란 줄기를 세워 키 재듯 서 있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잎 하나하나에 집중하듯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쁘게 커 가는 나의 레몬트리들입니다.

 “너희들도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잘 자라 주렴.”



4) 꽃과 은혜의 이야기


유리는 정자 정원 옆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맑게 피어 있던 세 송이 꽃,

칸나, 남천, 그리고 원추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름도, 꽃말도 익숙했지만 오늘은 왠지 그 꽃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열정과 고마움, 행복과 전화위복, 사랑과 망각…’


유리는 조용히 그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 꽃들, 나를 닮았구나.”


칸나 – 열정, 고마움, 쾌활함을 담은 붉은 꽃. 햇빛을 닮은 칸나가 벽을 등지고도 당당히 피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처음의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용기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리는 매일 하루를 열어 가는 자신의 마음이 그 칸나와 닮았음을 느꼈습니다.


남천 – 조용한 시간 속에서 피어난 행운. 바람이 스치자 남천의 잎이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소란 없이 견뎌 낸 시간, 그 작은 흔들림 뒤에야 피어나는 단단한 평안. 유리는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불행 같았던 순간들이 뒤늦게 복이 되어 돌아왔던 일들.

‘행운은… 고요한 가지 위에서 자라는 걸지도 몰라.’


원추리 – 하루만 피어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꽃. 노란 원추리가 해 질 무렵 조용히 피어 있었습니다.

단 하루만 피는 꽃이 조금은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아름다웠습니다. 슬픔을 잊는 데엔 시간보다

‘누군가의 공감’이 더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리는 조용히 꽃을 바라보다 마음속으로 속삭였습니다. ‘나도 하루만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피어나는 꽃이었으면 좋겠다.’



5) 말씀 앞에서


그날 저녁, 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아침에 묵상했던 민수기 7장을 다시 펼쳤습니다.

열두 지파 족장들이 차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장면. 하나같이 동일한 수량, 하나도 빠지지 않은 기록.


그런데 문득 유리는 궁금했습니다. ‘광야인데… 이 많은 예물은 다 어디서 났을까?’

잠시 눈을 감았다가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그들이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금과 은, 옷가지를 받아 나왔던 그때의 장면. 유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손에 필요한 것을 미리 채워 주셨던 거였구나…” 하지만 곧 다른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그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때. 같은 것을 가지고도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졌느냐보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더 중요했구나…’


6) 마음의 깨달음


유리는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 마음은 곧 자신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늘 부족하다고만 여겼던 자신,

글을 쓸 줄도 모르고 지혜도 멀게 느껴졌던 시간들. 그러나 지금,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마음을 따라 한 줄, 또 한 줄 적고 있습니다. “넘치진 않아도, 매번 꼭 살아갈 만큼은 주셨어요.”


꽃 앞에 멈춰 섰던 아침, 그리고 말씀 앞에 앉았던 저녁. 그 사이에 흘렀던 하루. 유리는 오늘도 가득하지 않아 더 따뜻했던 은혜 한 조각을 품고 천천히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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