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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쓰 Apr 12. 2020

the audience

엘리자베스와 총리들


지금은 혜화역,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헬렌 미렌 주연의 디 오디언스를 관람하고 - 무려 nt live! 저 정도로 현대문명의 이기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 동대입구역에서 전철 탔는데 반대로 왔지 뭐예요. 집으로 가는 전철 기다리는 중입니다.


1. 국립극장 입성기(a.k.a. 공부 안하고 놀러간 이유)

사실 별로 기대가 없었어요. 헬렌 미렌 연기 잘하는 거야 워낙 잘 알고 있고 스티븐 달드리의 이름도 여러번 들었지만 저는 리어왕이 보고싶었거든요. 엠마 톰슨이 앤서니 홉킨스와 출연한, bbc-아마존 합작 영화 리어왕을 본 지 얼마 안돼 국립극장에서 이안 맥켈런 주연의 리어왕을 nt live! 로 상영한다는 걸 알고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몰라요. 변시고 뭐고 다 던져두고 당장 가고 싶었죠. 근데 세 시간 반인 거에요, 상영시간이.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또 볼 기회가 올거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었어요. 요즘 쫄려서 책도 놓은지 좀 되는 바람에 심리적 소진 상태가 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거든요. 점점 집중이 안되기 시작한 겁니다.


헬렌 미렌의 디 오디언스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딱이었죠. 두시간 정도, 보장된 퀄리티. 처음 nt live! 를 접한 건 메가박스에서 상영한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햄릿이었는데 기가 막혔거든요. 얼른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혼자 영화 보러 다닌 적도 꽤 되는데 오늘은 약간 어색했어요. 혼자 온 사람들이 되게 많았는데도요. 연극은 누군가랑 같이 본다는 느낌이 강해서였을까요. 어쨌든, 정말 흥분됐습니다. 사진까지 찍었지 뭐예요.

촌년샷


2. 전반적인 느낌

연극은 기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왜 이걸 nt live! 의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골랐는지 너무 잘 알겠더라구요. 너무 영국적이면서도 전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의 정서를 담은, 이것 좀 봐, 영국에서 영국사람들이 만든 건데 장난 아니지? 하면서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을 작품. 이미 영화 더 퀸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연기한 적 있는 헬렌 미렌이, 반복되는 여왕역 때문에 이미지가 굳어질까 걱정한 걸 잊어버릴 수 밖에 없었을 만큼 엄청난 작품이었어요. 주연 배우로서 처음 대본 리딩을 할 때 느낀 그 전율은 어땠을까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ntlive 외국개봉시 포스터 같은데 힘을 많이 줬죠?


3. 탱구리의 출발 nt live! - '디 오디언스'편 

여왕의 집사 정도로 보이는 인물이 들어와 여왕이 통치한 이래 매주 화요일 저녁에 있어왔던 총리들과의 접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며 연극은 막을 올립니다. 토니 블레어는 단지 자신은 평범한 걸 원했을 뿐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그에 여왕은 어쩌다 그 꿈을 포기하시게 됐냐고 묻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첫 대화이고 어쩌면 이 극을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첫 두 문장이죠.


nt live! 가 좋은 점은 셰익스피어와 같이 현장에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작품들을 좋은 해석(자막 등)과 같이 볼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비하인드를 함께 볼 수 있다는 부분에서 극대화됩니다. 디 오디언스에서도 중간 휴식시간엔 여왕의 의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짤막한 영상, 커튼콜 이후엔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와 헬렌 미렌이 작품에 대해 나누는 짧은 인터뷰가 삽입되었습니다. 영화 코멘터리를 찾아보는 사람들에겐 꿈같은 거죠.


헬렌 미렌은 자신의 첫 대사를 아직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다 그 꿈을 포기하게 되셨나요? 라는, 간단한, 하지만 절대 평범해선 안되는 그 대사를 여왕으로서 말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다구요. 저 문장은 의문문입니다. 스티븐 달드리도 말하듯이 여왕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되려 질문해야 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연극도 첫 대사는 총리가, 그 후 따라붙는 질문은 여왕이 합니다.


블레어에 이어 들어오는 수상은 윌리엄 처칠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즉위하게 된 젊은 여왕에게 처칠은, 군주는 신하에게 마실 것도 의자도 권하지 않는다며 굳건한 군주가 될 것을 주문하는 동시에 그저 수상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메모하며 질문은 가끔만 하라며 현재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어떤 위치인지 생각하게 하죠.

접견이 처음이라 몰랐다며 웅얼대던 젊은 여왕은 점점 자리에 익숙해지며 철저하게 자신의 의중은 숨기고 주로 들으며 질문을 던지는 노련한 여왕의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블레어 다음 처칠이라는 순서에서도 알 수 있듯 연극은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데요. 때문에 관객들은 여왕의 머리색과 자세, 몸의 실루엣과 의상을 보며 당시 시대와 총리의 정체를 유추해야 합니다. 이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임무인 동시에 엄청난 지적 자극이 되죠. 하지만 반대로 배우와 스탭들에겐 짊어져야 할 과업이 됩니다. 

가장 어려웠다고 배우와 감독, 스탭들이 반복해 이야기하는 것은 여왕의 의상 변화예요. 처음에 극작가 피터 모건은 여왕의 나이 변화를 생각하지 않고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 모두가 그건 불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극의 형식은 엄청나게 바뀌게 되고, 결국 지금과 같이 무대 위에서 갈아입는 방식으로 정착되죠. 아쉬운 것은 nt live에서는 그 부분을 잡아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대에서 배우가 갈아입는 모습이 들어오게 촬영하지 않았어요.


4. 탱구리의 관람 후 너낌

이번에 상영한 영상은 2013년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했을 때 촬영되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생인 헬렌 미렌은 당시 68세였네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 식상한 말을, 그녀는 무대에서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이십대부터 팔십대까지의 여왕을 넘나들며, 표정과 목소리 높낮이, 발음과 톤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던 그녀는 무대 위를 누비는 거인입니다.


커튼콜 이후 스티븐 달드리와의 대화에서 헬렌 미렌은 말합니다.

예전 엘리자베스 1세를 표현할 때는 오로지 글로만 인물을 파악해야 했는데 이번엔 영상 자료가 아주 많았지만 그게 오히려 쉽지 않았다. 영상 속 여왕은 아주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초상화가들에게 아주 너그러웠던 그녀의 초상화를 보며 훨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느 순간 나도 그녀의 초상화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수많은 초상화들에는 여왕보다는 그녀를 그린 초상화가들이 더 많이 담겨있다. 화가 자신의 눈에 담긴 여왕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의 여왕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눈, 나의 눈으로 본 여왕의 모습인 것이다.


저 말을 듣는데 왜 그리 소름이 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헬렌 미렌의 표정이 무척 결연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일면 학자 같기도 하면서 어떻게 보면 무사와도 같은 눈으로 자신이 느낀 여왕을 그려내려고 했다는 위대한 배우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일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을 누구보다 당당히 드러내는 그녀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제 본 그레이엄 노튼쇼에서 2019년 9월의 노배우는 러시아의 유명한 여왕, 캐서린 대왕역을 맡아 드라마를 찍었네요. 여왕역에 더 적합한 배우가 있을까요. 케이트 블란쳇은 좀 젊으니 다른 그룹으로 치죠. 간만에 메마른 일상에 단비가 된 공연이었습니다. 다음에 볼 nt live가 기대되네요.

+

extra. 위에 간략히 언급한 여왕과 처칠의 대화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똑같이 재현됩니다. 대화 자체가 유명하기도 하겠지만, 대사가 정확하게 같은 데서 오는 기시감은 아마 피터 모건이 [더 크라운]과 [디 오디언스], 두 작품 모두의 작가라는 데에서도 기인했겠지요.


2019년 9월 29일 즈음 쓴 글.

+

2020년 2월경, 그러니까 올해 초 제임스 코든 주연의 [한 남자와 두 주인]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딱히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nt live 자체를 소개하는 글은 한 번 쓰고 싶어하다 일단 이 글이라도 먼저 내보내야지 싶어 께림칙한 마음으로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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