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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상민 May 04. 2021

핀란드 화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그렸다.

<부상당한 천사>

<부상당한 천사>, 휴고 짐베르크, 1903 / 출처: 아테네움 미술관
<그림의 힘>, 김선현(2021)의 책을 읽고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개인적 해석을 다룹니다.


유명한 그림이다.

핀란드 국민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그림이자,

미술 치료 그림으로도 쓰인다.


그림을 처음 보는 대부분은 천사에 주목할 것이다.

붕대를 머리에 감은 천사가 들것에 들려 실려간다.

날개 달린 천사가 다 어린아이들에게 실려가고 있다.

양쪽 아이들의 표정도 우울하다.


우울해 보이는 그림이 미술 치료로도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그림 속 인물과 감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극히 우울할 때 행복한 사람을 본다고 해서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그림을 통해 우울을 마주할 때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너도 나처럼 많이 힘들었구나, 그랬구나.

짐베르크의 그림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다양한 해석보다도 짐베르크의 생애가 궁금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의도 이전에

그 당시 화가의 인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테네움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1902년 늦가을부터 1903년 봄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신경질환으로 아주 애를 먹었다고 한다.

많은 고통 속에 신경질환을 치료해 낸 짐베르크,

그는 그때 기적을 경험했고

생명을 새로 얻은 기분일 것이다.


다시 그림을 보자.

날개만 달렸지, 천사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의미와

죽음 앞 인간은 나약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볼 수 있겠다.


오른쪽 아이는 열심히 그림 감상하고 있는 날 쳐다본다.

너에게도 죽음은 언제든 올 수 있어

라고 말하듯.


죽음을 목전까지 경험했던 짐베르였기에,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헌데, 참 이상하다.

짐베르크는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림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목란은 줄만 남겼다고 한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 짐베르크의 예술관은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예상컨데,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짜증 났지 않을까?

실컷 죽음 앞에서 인생의 부질없음까지 느껴온 바를

그림에 양껏 담아 그려냈건만, 이놈의 관람하는 사람들은

짐베르크가 아팠어서 그랬겠거니,

핀란드 신화에서 따온 거라더니,

그림 속 해석에만 매몰될 뿐.


짐베르크가 받았던 신경질환의 고통,

외롭고 두렵게 병마와 싸웠던 짐베르크의 심정,

몰라줬기 때문이 아닐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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