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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상민 Mar 07. 2019

텅 비어버린 청년세대

장강명의 <표백>을 읽고

장강명, <표백>


허옇게 뜬 얼굴이 가득한 표지는 섬찟했다.

잠결에 깨 책 표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까지했다.

표백, 하얗게 한다는 뜻이다.


장강명의 <표백>은 '자살선언' 이야기다.

더 이상 위대한 일이라곤 할 수 없는,

시시한 일들만 남은 상태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세연은 강한 무력감과 불만을 느낀다.

그녀는 연쇄자살의 형태,

'자살선언'으로. 현 사회를 공격한다.

그녀와 그녀의 추종자들은 자살을 통해

현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고자 한다.


시시해. 별로 위대하지 않아. 시시한 일을 추구하면 사람의 값어치도 낮아져. 실패하더라도 굉장한 걸 쫓아야 해. - P69 인용, 세연



자살선언, 수동적 행동에 불과


자살선언을 계획한 세연의 논리는 대략 이렇다.

이미 위대한 일들은 다 이루어지고

남은건 고작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따위인,

부조리한 현재 사회에 허무함과 불만을 가진다.

이전 세대가 만들어둔 틀을 따라가야만 하는

현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고자 한다.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자살선언을) 실행하라. - P161


저항의 방법이 바로 연쇄자살, 자살선언이다.

삶의 부족함이 없을 때 자살함으로서

저항의식을 보이는 자살선언은 사회에 저항하는

과격하고 맹렬한 방법이다.


정말 그럴까?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안드는 사회를 향해 공격함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자살선언은 그러한 측면에서 검토했을 때

매우 수동적인 방법이다.

마음에 안드는 사회에 균열을 줄 수는 있다.

갈라진 사회를 보수하는 역할은 누가 할 것인가.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에 불만을 표하면서

정작 문제 해결을 기성세대에게 맡기는 행태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모순적이다.


자살이라는 방법은 단절적이다.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자기지속성의 포기다.

그렇기에 자살 이후 벌어지는 일에 관여할 수 없다.

문제가 많고 불확실성이 커진 복잡한 사회에서

자살을 통한 저항은 충격적이지만 일시적이다.


우리가 자살을 한 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 P151 인용


"비록 사회가 달라지지 않을지언정, 우리는 저항했으니 그걸로 만족해." ...?

자기만족을 위한 자살,

위대하기는 커녕, 시시하기만 하다.



누구를 위한 자살인가


살선언의 선구자인 세연을 따라서

세연의 추종자들은 자살선언을 통해 자살한다.

세연의 논리에 공감하여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선언이 활발하게 진행될수록

자살선언의 선구자인 세연은 우상화, 신격화된다.


자살을 결심한 추종자들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그들의 저항의식? 과감함? 아니면 해방감?

남 따라 죽은 그들을 세연은 시시하다 여길 듯 하다.


선구자인 세연은 추종자와는 격이 다르다.

여러 사람들이 따르고 섬기면서 오래도록 남는다.

세연의 논리와 말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한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오직 세연만을 위한 자살선언


세연은 그렇게 위인이 되고, 추종자들은 잊힌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자살선언과 종교, 둘 다 우상화 측면에서 유사하다.

집단 내에서 공유하는 이념을 따르고

하나의 대상(ex. 세연, 신)을 떠받들고 존경한다.


차이가 있다면 종교는 추종자를 살아가게 하지만,

자살선언은 삶의 지속성을 앗아간다.

안정감을 뺏는 자살선언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살선언이 추종자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만큼

가치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있더라도 망설여지는데!

선동에 이끌린 자들은 자살선언으로 얻은 것보다

자살선언으로 인해 내어놓는 것이 더 많은,

극심한 손해의 상황에 처한다.


난 내가 많은 재능과 가능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삶을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싶어. - P143 인용, 세연


자살선언의 본 목적은 저항의식의 표출이 아니다.

자살선언은 개인의 만족과 자아도취의 결과물이다.

굳이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위대해지고자 하는 욕심에 빠져

저항이라는 명분을 빌미삼아 사람들을 선동했다.


사회 내부에서 시시한 일밖에 못하는 불리한 삶?

그렇기에 더 도전해봄직하지않은가?

사회의 발전으로 사상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발전했다.


세연은 필연적으로 현 사회의 수혜자이며,

발전된 사고와 사상을 바탕으로

표백된 스스로의 세대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당위적 책임이 사회의 간접적 수혜자였던 세연에게는 있다.

적어도 타인의 자살을 권유했던 세연에게는 분명.



무력감과 허무감, 청년 세대의 내면


단순한 선동에 불과한 세연의 말은

소설과는 달리 선동의 역할조차도 못할 듯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한다.

특히 대상이 되는 청년세대의 경우,

실행하진 않겠지만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있던 질문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정답을 읽어야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 P78 인용, 세연


세연이 말한 표백 세대에 그 이유가 있다.

'표백'이라는 표현은 현재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허무함, 무력감을 관통한다.

그렇기에 듣는 이를 강력하게 설득하는 힘이 있다.

논리의 엉성함은 감정앞에서 숨겨진다.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끼는 소외와 고독 상태,

표백된 청년 세대를 저자는 이해하고 있다.

자살이라는 방법이 제기된 논리는 빈약하더라도

청년세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공감하고 흔든 점.

세연의 논리가 먹혀들어가는 이유일 것이다.



소결


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두 갈래로 정의하면,

하나는 청년세대가 공유하는 무력감을 밝히는 것,

또 하나는 선동의 본질적인 면을 꼬집는데 있다.


청년 세대가 공유하는 무력감을 사회에 알려

소외 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저자의 시도이자,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능동적 행동이다.

사회가 청년 세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살보다 낫지 않은가?


본질적으로 선동이 지닌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선동은 결과적으로 대표자, 선구자만 이익을 본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동시에 만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선동이라는 빨간 딱지를 떼낼 수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은 선택할 수 없다.

사회가 변화하는 것도 좋지만

청년 세대에게는 각 개개인이 더욱 소중하다.

청년 세대의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다같이 모색해보는 평화로운 방법은 어떨까?

충격적이지는 않아도 가장 이상적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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