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프랑스와의 비교
예술계 종사자들을 향한 박한 대우는 예술을 더욱 배고프게 했다. 착취가 열정과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정당화되던 예술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예술가들도 근로자로 인정받고자 한다.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예술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결코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동안 예술가와 근로자는 우리 사회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부분으로 여겨졌다. 이번 글에서는 법적인 근로자의 정의를 살펴보고, 프랑스와의 비교를 통해 예술가와 근로자의 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제2조에 따르면,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명시되어있다. 이때 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제2조에는 '근로자라 함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 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라고 명시되어있다.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두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의 개념에서 좀 더 잘 드러나는데, '임금을 목적으로'함은 무상 혹은 다른 목적으로 하는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은 근로자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의 경우 근로자의 개념에 대한 입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근로자를 구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존재하는데, 가장 주목할만한 기준은 '임금의 존재 여부'와 '종속관계'다. 임금을 목적으로 한다는 모호할 수 있는 기준 대신 임금 혹은 급여의 존재 유무로 근로자성을 판단한다. 임금을 주목적으로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또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근로자와 사용자 간의 종속관계가 존재하는지 폭넓게 살펴보기도 한다. 맥락을 고려하여 종속관계가 존재한다면 근로자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발생한 수익을 분배한다고 해서 종속관계가 없다고 보지 않고 손해를 분담하는 정도가 되어야 종속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즉, 두 나라의 근로자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임금을 받는 종속관계에 얽힌 예술가들은 마땅히 근로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아야 한다.
프랑스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실업급여제도인 '앵테르미탕(intermittent)'이 있다. 앵테르미탕은 프랑스어로 ' 불규칙적'이라는 뜻을 지녔다. 이름처럼 불규칙적인 수입을 지니고 있는 예술가들을 위한 제도이며, 일종의 보험 성격의 제도다. 예술가들은 매달 버는 돈을 정부에 신고하고 그중 일부(약 절반)를 보험료로 지불합니다. 신고된 수입을 바탕으로 기준 수익을 제공하고, 수익이 없거나 기준 수익에 못 미치는 달에는 부족분만큼을 정부에서 지원하는 형식이다. 이 제도는 수입이 과도하게 많은 예술가들은 보험료만큼도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 적용 대상의 측면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한다(아무리 많은 분담금을 납입해도 1일 147유로, 월 3797유로 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 이외에도 프랑스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제도들이 존재하고 있어 예술가가 예술 생활만으로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예술가 지원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던 건 프랑스 내부의 특수성 덕이다. 프랑스에서 문화예술산업은 국가 핵심산업으로, 과거부터 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컸다. 공연예술을 단순한 돈벌이 사업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의 공공재로서 인정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적으로 짙게 깔려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을 위한 복지에 논의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쉽게 도출되었다. 공공재를 담당하는 예술가들에게 국가차원에서 마땅히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관료나 홍보비에 대한 걱정이 없다는 점도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와의 차이점이다. 민간 극장에 대한 막대한 지원은 공연하는 극단들이 대관료나 홍보비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게 해 준다. 공연을 대관하지 않고 초청 공연의 형식 혹은 공연장 자체 제작방식으로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간 극장, 국공립 공연장을 가리지 않고 대관 공연을 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7 공연예술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992개 공연시설의 총 공연건수 34,051건 중 22,362건이 대관공연에 해당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공연 중 약 66%가 대관공연에 해당할 정도로 대관공연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우리나라 극단은 대관료와 홍보비 등을 고려하여 예산을 편성하기에 수익 내기가 더더욱 어렵다.
국가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수익성을 요구하며 극단 스스로의 재정자립도를 높일 것을 요구한다. 극단의 재정자립도 요구 등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는 공연예술을 비롯한 예술계를 공공재가 아닌, 하나의 사업으로 보고 있다. 수익 창출이 주된, 유일한 목적으로 보며 예술을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전 글(2. 상업화된 공연예술 참고)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극단적으로 상업화되고 있는 공연예술계와 예술경영의 상업적 시각이 예술계에 만연한 상태다. 프랑스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상업적 시각이 오히려 예술가의 생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관료와 홍보비, 인건비를 제하면 실제로 남는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극단은 무대를 계속 꾸려나갈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은 반드시 지원이 필요하다. 또, 예술을 상품화된 산업으로 보기 시작한다면 국가 차원에서도 예술을 지원해줄 명분이 없어진다. 사회적으로 예술은 일부만 여가생활로 즐기는 사치로 여겨질 것이며, 예술을 향한 지원에도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예술에게 지원이 끊기게 된다면? 지금처럼 예술가들은 계속 굶주림을 견딜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근로자의 개념, 그리고 프랑스와 우리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예술계에 존재하는 악순환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술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각은 고스란히 예술 정책에 반영되어 우리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술경영의 차원에서 재정자립도를 높여 예술 스스로가 자생할 수 있도록 하려는 상업화는 오히려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예술에 대한 지원의 명목을 없애는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예술산업은 노동집약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기에 기술 혁신 등으로 비용을 대폭 감소시킬 수 없다. 예술계 스스로 이윤을 내어 재정자립을 할 수 없는 태생적 구조를 이해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예술 장려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예술계의 진흥과 선순환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