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대신 희망을
주기적인 사색이 필요할 때마다 도서관에 간다. 집에 있으면 눕기 바쁘고 카페는 노랫소리가 거슬려 사색에 잠길 맛이 나지 않아서다. 도서관은 집에서부터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 사실 걷기만큼 사색에 좋은 행위가 없다고 하지만 남루한 체력을 아꼈다가 사색에 쏟아야 하기 때문에 버스를 탄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는 나라가 설치해주는 의자 대신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의자 6개가 있다. 2개는 화이트, 2개는 다크 브라운, 2개는 카멜. 나름 골라서 앉을 수 있다. 주로 할아버지나 아주머니들이 여기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이 의자들로 우리 동네에 그럴싸한 복지를 제공한 사람은 누굴까. 새 의자가 아니라 쓰던 의자를 가져온 의도는 무엇일까. 색상 별로 진열한 까닭은 무엇일까. 머리에 여러 질문이 쏟아진다. 아마 착한 범인은 싱크 공장 사장님일 가능성이 높은데, 왜 의자를 갖다 놓았냐는 질문에 예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대답은 '그냥'이다.
그냥, 그냥, 그냥
괜히 이런 데서 나의 염세적인 세계관이 격하게 흔들린다. 오랜 시간을 거쳐 견고하게 건설한 냉소의 세계는 누군가가 흘려 놓은 애정에 휘청거린다. 주위를 쓱 살피고 조심스레 맨 오른쪽 카멜색 의자에 엉덩이를 갖다 댄다. 근데 버스 기다릴 때 앉으라고 갖다 놓은 게 맞겠지?
어제 또 발견한 친절한 가게 벽면에는 "버스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세요!"라는 말이 적힌 하늘색 종이가 붙어 있다. 나를 괜히 부끄럽게 만드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