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by 영주

몇 주 전 신랑의 외할머니가 별세하셨고 장례를 치렀다. 3일간의 장례가 연고도 왕래도 깊은 친분이나 정도 없던 사이라 그런지 제법 지난했다. 신랑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퍽 서운했을지 모르지만 장례 첫날과 이튿날은 인사치레로 저녁시간에 몇 시간 자리를 지키다 돌아왔고 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어쩌면 그들에겐 제3자인 나로서 장례를 지켜보는 동안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과 이제는 정말 보내야 한다는 미련이 뒤섞인 애도가 웬일인지 생경하게 다가왔다.


내가 죽어도, 내 시신 앞에서 애도해 줄 이들이 있을까? 난 자식도 낳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저 앞에 서있는 누군가는 언니나 형부가 될까? 적어도 부모님은 아니어야겠지. 신랑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 친구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고 싶지도 않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지루한 발인과 화장 절차를 관망했던 것 같다.



재작년 작은 고모부의 장례가 생각이 났다. 어려서부터 항상, 늘 어울려 자랐던 나의 가족 나의 어른이자 키다리 아저씨였던 작은 고모부는 뇌졸중에 의식을 잃었고 곧 말을 잃으셨는데, 호전되던 찰나에 요양 간호사로부터 옮은 코로나로 병세가 악화되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병문안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풍채가 좋은, 늘 웃고 있지만 단호하고 친절하지만 냉정한 작은 고모부의 멋진 모습만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가 더 슬프고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2년 여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더 거슬러 올라가 죽음의 소식도 몰라 애도조차 하지 못한 죽음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르기도 전에 시작했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던 작은 회사 사장님. 아빠 첫 직장의 은사님이라고 했다. 나를 막내딸처럼 어여삐 여기셨다. 인상을 쓰며 담배를 태우다가도, 커피 한 잔 타서 방문을 열면 함박웃음으로 담배를 비벼 끄고 창문부터 열며 '잠시 있다가 들어와라'라고 하셨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편입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원 앞까지 찾아와 편입하지 말고 정규직으로 입사해 본인 밑에서 일을 배우라고 하셨다. 고맙지만 불쾌한 제안이라고 느꼈던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사장님을 볼 수 없었다. 편입시험을 치르고 신난 늦깎이 대학생활을 즐기던 여름 즈음 췌장암 말기 증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 이듬해 가을이 되어서야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다. 사장님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도미찜을 했으니 직접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다던 엄마에게 짜증이나 내지 말 걸. 등신 같은 년.


고등학교 1학년때에는 친할머니가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즈음 지난 8월의 여름, 간밤에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당시 12살이던 남동생은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을 오래 기억하라고 이날 돌아가셨나 보다"라는 일기를 썼다고 한다. 할머니의 죽음은 20년이 지난 지금, 아스라이 기억 속에 희미해지고 있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엄마의 요청으로 거동이 불가한 할머니를 부축해 휠체어에 태우면서 만졌던, 뼈만 앙상했던 발목의 촉감이다. 명백히 그때 알았다. 할머니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겠구나. 그래서 무서웠고, 그 두려움이 할머니에게 투영되어 그날 이후 할머니의 살을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싫었다. 어렸던 나였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사라졌고 이상하리만큼 우리 가족은 평화로워졌다.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장례를, 누군가의 죽음을 치렀고 그때마다 "나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늘 변하지 않는 마음이었는데ㅡ 내가 죽을 때 내 시신 앞에 장의사 외에 날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도 나의 죽음으로 마음의 무게추가 달리지 않기를. 비록 고독한 죽음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측은해할지언정 날 걱정하는 이들이 나의 정인이 아니길 바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술도, 담배도 줄이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 모두를 안녕히 잘 보내줘야지.


죽음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했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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