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 있는 삶

by 영주

평일에는 늘 퇴근하고 오면 나무(반려견)랑 산책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티브이도 보고 빨래도 개고 책도 보고, 주말에는 이렇게 운동하고 밥 먹고 나무랑 바람 쐬러 가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자칫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평범한 일상이 주는 무게감과 안정감이 정말 크다. 이제 이것들이 없다면 내 삶은 위태로워질 거야.


주말 오전 뚤래뚤래 손 잡고 아파트 헬스장에 쇠질하러 가는 길에 신랑이 문득 저런 말을 했다. 덧붙여서,


얼마 전 자기가 그랬잖아. 무탈한 하루가 감사하게 느껴진다고.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고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과 그 타이밍이 비슷한 게 정말 신기하고 다행이다. 그렇지?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다. 그래서 결혼했지.






결혼한 지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종종 엽서나 편지를 주고받는 지인들,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내게 보내는 메시지 중 하나는 "안정적 이어 보인다"는 말이다. 감정적으로, 현실적으로 평화롭고 모든 균형이 잘 어우러져 보기 좋다는 의미이라고 한다.


그런가? 내가 그랬나?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5년 전에는 더할 나위 없이 불안정한 존재였던 나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저런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10대를 지나 20대 후반까지 정체성과 취향, 자아와 꿈, 미래와 현실 같은 삶의 시소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찾아 까치발을 들고 헤매던 나였는데, 안정적인 삶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의구심에 고개를 돌리다 내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고롱고롱 자고 있는 하얗고 작은 나의 강아지 털을 만지니 맞긴 맞네 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런 내게 "차 한잔 마시면서 해"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컵을 건네는 신랑까지 완벽하지 않은가.





식탁 옆 키가 높은 수납장 위엔 아무 물건이 없는 것이 좋다. 그 위에 꾸준히 잡동사니들을 올려두고 "식탁 정리 다 했어"라고 하는 신랑 얼굴에 싫은 소리를 하기엔 너무 해맑아서 5년 내도록 아무 소리 안 하고 틈이 나면 치우고 버리고 있다.


주방은 항상 깨끗한 것이 정신상태에 이롭다. 설거지 통은 비어있고, 싱크대 위엔 원두분쇄기나 조리도구 정도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야 깨끗하다는 인상을 준다.


야외활동이 어려운 한여름과 겨울엔 주말에 꼭 낮잠을 잔다. 불면증이 심했던 나와 신랑은 결혼 이후 둘의 체온만 느끼면 곯아떨어지기 일쑤라 어떤 날은 눈을 뜨면 저녁밥때가 되어있기도 하다. 주말인데 잠만 자고 저와는 놀아주지도 않아 뿔이 난 강아지가 어둠 속에 오도카니.


몸이 힘들 땐 반드시 집밥을 요란스럽게 해 먹는다. 뜨끈한 국물, 정갈하지만 간이 세지 않은 집반찬으로 배를 채우면 이튿날이면 반드시 힘이 나고 정제된 것만 같은 몸을 가진다. 집밥이 이렇게 좋은 건 줄 결혼하고 처음 알았다는 신랑의 너스레가 고맙다.


그런 나날이 변하지 않고, 이런 나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불편함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호위반이나 과속 딱지가 날아와 인상을 찌푸리는 일도 없고 적지 않은 종잣돈을 넣어둔 주식 종목이 폭락해 밤잠을 설치기엔 안전 제일주의인 신랑과 나에겐 먼 이야기일 뿐.


곧 가을바람이 불면 타프와 캠핑의자를 들고 가까운 노지 캠핑장으로 과일을 싸가지고 가겠지. 겨울이 오면 방한용품을 문 앞에 꺼내어두고 강추위에도 강아지 산책시키기 미션을 완수하러 비장하게 현관문을 나설 것이다. 내일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고 낮잠만 잘 수도 있지만, 이번 주말엔 뭘 할까라는 잡담으로 업무의 지루함을 달래는 월요일이 되겠지. 그럼 또 화요일이 될 테고, 곧 주말이라며 힘내자고 서로를 격려할 거다.


변동폭이 크지 않아 불편하지 않은 변화 혹은 조율. 대략 예측 가능한 오늘과 내일. 그것을 함께 영위하는 반려인과 반려견의 익숙한 행동과 표정. 이 모든 것이 쉬이 깨지지 않는 환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 이 삶을 위해 우리 둘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며 되도록이면 서로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성실한 하루를 살아낼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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