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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Jun 28. 2022

재미있게 걷기

허리디스크 환자의 재활일기

종종 약속시간에 5분~10분씩 늦던 친구가 있었는데, 늦었음에도 약속 장소 저 멀리서 차분히 걸어오는 친구의 얼굴이 괜히 약이 올라 늦는 이유에 대해 물었고 돌아온 답은 다소 신선했다.


- 매번 같은 길로 오면 재미없어서, 올 때마다 다른 길로 오다 보니.. 미안 (머쓱)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다니던 동네의 골목들은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고 자부했고 그렇기에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일 뿐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매일 새로운 재미와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득 학창 시절 몰래 훔쳐본 언니의 다이어리에 적힌 글귀가 생각났다.

길은 걷는 자의 몫이다.




퇴원수속을 밟으며 의사 선생님이 내린 처방은 '많이 걸으세요'였다.

혼자 서고 걷지도 못하는 나에게 걸으라고요? 그것도 많이? 반항기 가득한 내 표정을 읽고 의사는 유산소 운동이 디스크에 산소를 공급해주기 때문에 재활과 재생에 꼭 필요하지만 허리에 하중이 가해지는 운동은 피하라고 설명했고, 제대로 걷기만 해도 하체와 등근육이 생겨 허리에 전달되는 압박이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알겠어요, 할게요. 한다고요.

하지만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걸어가는 것조차 귀찮아 한 번 외출하면 모든 볼일을 쳐내고 돌아와 며칠을 칩거하던 성향의 '귀차니즘 집수니'였던 나는 매일, 그것도 많이 걷는 것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모레 아파트  앞 편의점이라도 가기 위해서는 숙제를 해야만 했다.



공간의 이동을 위 해 걷는 것과 재활운동을 위해 걷는 것은 확연히 달랐고, 매일 치료를 위한 걷기 숙제를 해내기 위해서는 재미와 동기부여가 절실했다. 그래서 더욱이 매번 늦던 친구의 새로운 경로탐색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온, 저 멀리 개껌을 뜯고 있는 나의 반려견 '나무' 아, 이건 운명인가?

나무에게 산책이란 밥보다 즐거운 일이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걸어야 했는데, 그래 이것을 시작점으로 해보자! 용기를 내고 나니 전라도 여수에서 태어난 나무와 서울에서 태어난 내가 경상도에서 함께 살고 있음에 묘한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마치 콜럼버스 크루라도 결성한 듯, 나무와 나는 리드 줄에 서로를 의지해 매일 새로운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지났던 길을 반대로 걷고, 오늘은 평소 궁금했던 큰길 끝에 있을 가게가 뭔지 보고 오기로 했다. 내일은 그 길 중간에 있는 골목으로 빠져봐야지.

운전석에 앉아있을 때에는 몰랐던 동네의 구조와 골목의 풍경, 항상 그곳에 있었을 테지만 나는 몰랐던 미술학원과 식물 가게들을 알아가며 이 큰 도시에서 홀로 무언가를 즐기고 있음에 또 다른 동기부여를 얻었다.


지난주 만났던 산책하던 강아지와 견주를 다시 마주칠 때의 반가움, 고작  블록 거리였던 치킨집 위치를 알게   괜히 씁쓸해진 배달료,  가까이에 24 무인 애견용품점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건물 주차장에 가려져 몰랐던 꽃가게를 발견해 기념일에는 신랑에게  선물도 했다. 아파단지들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공원은 나무와 나만의 아지트가 되었고, 회사에 싸갈 도시락 반찬을 사러  단지 반찬가게에 들르기도 한다. 신랑은 이곳 토박이인 본인보다 동네를 빠삭히 알고 있다는 말을 흐뭇한 표정으로 건네며 디스크 치료에도, 새로운 터전에도  적응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하기도 했다.

(예시사진/대전 엑스포다리)

유달리 좋아하는 산책의 묘미 중 하나는 야경인데, 신도시의 상징인 '뭐뭐대교'는 항시 현란한 불빛으로 예쁜 야경을 선물한다. 땀이 흥건해진 몸을 세워 잠시 숨을 고르며 보는 장면은 때때로 강남역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것보다 고요하고 웅장해 훨씬 좋다.





길마다 다른 풍경이 있다는 기대감과 돌아 돌아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 거리를 채우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 걸으며 느끼는 보통의 삶이 주는 안락함은 무한 뷔페처럼 풍족하다. 아마 약속시간에 매번 늦던 그 친구는 걷기로 마음만 먹으면 무료로 누릴 수 있는 저 많은 것들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나 보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비유를 빌리자면, 지금 나는 앞만 보고 헐레벌떡 뛰기 바빴던 때를 지나 허리디스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고 스스로 일어서고 걷는 법을 배우고 있는 단계인  같다. 실컷 넘어진  피칠갑을  무릎에 붙여준 예쁜 핑크색 대일밴드처럼, 길은 걷는 자의 몫이라는  넘어져본 사람만이   있는 보상 같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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