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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y 30. 2022

불행과 행복 사이

질풍노도의 20대를 지나온 서른 다섯 어른아이


아.. 정말 행복하다

주말 밤 장을 보고 들어오며 집으로 가는 길의 야경을 보니  나도 모르게 뱉어진 감탄사였다. 그런 내 모습이 낯설고 괜스레 부끄러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행복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는지, 신기하다고 하니 신랑은 이내 "좋은 일이야, 즐겨요"라고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생각에 잠겼다. 즐기기에도 부족한 이 감정을 왜 그렇게까지 전전긍긍 곧 달아날 전선 위의 참새처럼 여겼으며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자랑하기 어려워했는지에 대해. 답은 의외로 쉽게 떠올랐는데, 서른 초반이 되기 전까지 나는 “행복을 누리는 건 내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던 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참 많았을 텐데도, 행복한 내 모습을 두려워했으리라.

 



행복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1~20대의 자기 객관화 결과였다. 누구나 한 두 개쯤 다 있는 미래 계획과 꿈이란 것이 내게는 모래성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었고, 당연히 그에 관련한 청사진조차 없었다. 뜨겁게 지는 해가 예뻤고 빗물을 머금은 밤길이 찬란해 넋을 잃고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그렇게 감상에 빠져 살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레이스 위에 나도 있음을 알았고 더불어 양옆 앞뒤로 나보다 더 잘, 멀리, 많이 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며 상대적 박탈감과 자기비판의 시기가 도래.  대학에 큰 뜻이 없었던 나는 수시는 커녕 수능으로도 소위 말하는 중상위권 대학을 갈 수 없어 전문 여대를 자퇴, 반수(반년 동안 수능을 준비하는 것)에 도전하였으나 참패 후 학점은행제로 학사편입을 준비했다. 스물둘 밝게 빛나는 여대생의 모습이 아닌 것이 위축됐고 창피했다.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1년간의 편입 수험생활을 해야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 그래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도 스물셋인걸? 호기롭게 아르바이트와 편입학원을 병행하며 10개월 후, 모의고사 40점대 학생이 당당히 서울 소재의 4년제 대학 3곳에 합격했다. 그래도 부족했을까? 내게는 더 큰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갈망하며 스스로 쌓아 올린 고독의 벽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나는 행복을 두려워했다.


본래 두려워하는 것을 갈망하는걸까? 항상 꿈꾸던 어른의 모습은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이 고난의 돌길을 맨발로 헤쳐나가며 버티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십자가와도 같은 감내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이 모든 과정은 행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자기 위로를 일삼으며 나노 크기로 조각나 있는 나의 에고(ego)를 찾아나가는 여정 이리라 그 길의 끝에 완벽한 행복의 형태를 거머쥐리라 종교처럼 믿은 그 시절과 그때의 신념을 져버린 지금.


서른다섯이 나는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행복할 방법을 찾을 줄 알고 벅차 오르는 행복에 눈물을 감출 수 없다.






내 행복의 씨앗은 어디에서 발아했을까? 이 클리셰 짙은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맞습니다. 제 모든 고통의 시간이 제 행복의 거름입니다”

이 뻔한 수학공식 같은 문구를, 32년간 나고 자란 곳을 떠나와서야 풀 수 있었다.

긴 시간 비탈길과 비포장도로를 걷는 것만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기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두려워해 애써 외면하고 사는 누군가에게, 다가올 타지 생활이 혹은 변화를 보다 편히 맞이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서른 다섯 해 동안 부모님이 다져준 영양 가득한 토양 위에, 단비 같은 사람과 관계들이 뿌리내렸고 그 가지와 잎사귀 사이에서 사랑을 배워 행복이라는 열매의 단맛을 느끼느라 하루가 짧기만 한 내 밭에 잠시 다녀감으로 인해 건강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32년간 나고자란 서울을 떠나 깨달은 행복의 조건들>을 시작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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