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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Oct 21. 2024

우리는 한 번도 부모인 적이 없었다

잘하려고 했지만 결국 너에게 고통을 주었구나.

-죠슈아 콜먼의 자녀는 왜 부모를 거부하는가’ 중에서-               




  얼마 전, 언니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언니 지인이 경험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상황은 이러했다. 어린이집 보육 교사인 그 지인이 아침에 등원하는 아이를 받다가 한 아이 엄마가 어린이집 문 앞 계단에서 아들에게 소변을 보게 하는 걸 보았다고 한다. 아이가 어린이집 안에 있는 화장실에 못 갈 정도로 급했나 보다, 생각하던 찰나 엄마가 아들을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난 뒤 아들의 소변을 그대로 두고 가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 목욕탕에 가서 봤던 게 생각났다. 탕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4~5살 정도 보이는 딸과 엄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언뜻 들어보니, 딸은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가자고 했고 엄마는 밖에까지 함께 나가는 게 귀찮아서였는지 아이에게 목욕탕 바닥에 있는 배수구에 소변을 보라고 하고 있었다.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보는 것은 노상 방뇨이다. 다시 말하면, 엄마는 귀찮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녀가 아들이면 이런 노상 방뇨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들이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당시 입원실에는 6명의 ‘아들’들이 함께 입원했었다. 그런데 그중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보이는 아이와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말다툼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화장실 문제 때문이었다. 링거를 꽂은 상태로 화장실에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엄마에게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 엄마는 아들에게 소변이 급할 때마다 작은 물병에 싸도록 했고 아이는 거부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조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해서 지키도록 배우기 때문에 집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라고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배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엄마로부터 ‘해도 된다’라고 배우게 된다면 아이가 성장하면서 ‘이것쯤이야, 괜찮겠지’라는 학습화된 규범적 무력감을 갖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는 내가 맡고 있는 반 아이의 휴대전화를 강제로 뺏은 적이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아이들의 휴대전화를 걷어서 종례 시간에 나눠 주고, 일부러 내지 않고 사용하다 걸리면 일주일간 압수된다. 그런데 이 학생은 휴대전화를 내지 않고 몰래 사용하다가 나에게 걸렸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1학기 방학식이었다. 학생은 그날 교무실에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휴대전화를 돌려줄 수 없냐고 부탁했고 나는 거절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그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학했는데 좀 봐주면 안 되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학교 규칙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며칠간의 짧은 휴가가 끝나고 보충수업이 시작되어 학교에 나간 날, 교무부장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그 학생 아버지가 학교로 전화했었어. 자기도 어느 학교 선생님이라면서 방학 중인데 휴대전화를 뺏으면 되겠냐고 말하는 거야, 좀 융통성 있게 하면 안 되냐고 하길래 내가 안 된다고 했지. 최 선생도 힘들었겠어.”     


  비단 그 아이 아버지의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각한 아이를 출석부에 표시했는데 아이의 어머니가 전화해서 입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지워 달라는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머리카락을 밝게 염색 한 학생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는데도 검은색으로 염색하기를 거부하는 학생을 강제로 집에 돌려보내서 염색을 하고 오도록 한 적도 있다. 그때 아이의 엄마는 내게 아이가 공부도 잘하는 상위권인데 고작 염색한 것 때문에 수업을 못 하게 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는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염색한 것은 ‘고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교 규정을 어긴 거예요.”

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실제 그 학생의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생활 태도는 좋지 못했다. 나만 좋으면 된다는 태도를 자주 보인 그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도 여러 번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어렸을 때부터 작은 규범들은 상황에 따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배웠을 것이다. 그 결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학습화된 규범적 무력감을 보이는 것이다.     

  여러 차례 시도해 봤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실패를 반복하고 마는 경우, 그 이유들이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새롭게 시도하지 않으려는 상황을 심리학자 셀그리만은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나는 해도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학습된 무력감에서 한 단계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할 경우에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추가하여, ‘학습화된 규범적 무력감이라고 사용하고자 한다.   

  

   학생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교내 규칙들이나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사회 규범들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런 규칙이나 규범들을 자신이 필요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배워 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공부만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된다’라는 생각은 아이로 하여금 학습화된 규범적 무력감을 심어주게 되고 그 결과, 당연히 지켜야 하는 사소한 규범들조차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1957년에 한국동화작가협회에서 '어린이 헌장'을 만들었다. 그 뒤 1988년에 보건사회부가 어린이 헌장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관계 전문가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 내용을 수정하였다. 개정된 어린이 헌장에는 어린이의 건전한 교육, 건강, 노동 등에 대해 사회의 보호를 구체화시켜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가. 변화된 사회와 상황에 맞게 어린이 헌장이 한 번 더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는 올바른 도덕적 규범을 부모로부터 배울 권리가 있고, 부모는 그러한 도덕적 규범을 본인 스스로 지키면서 아이에게 올바른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라는 부모의 역할이 강조된 항목을 포함한 수정된 ‘어린이 헌장’을 하루빨리 보기를 기대해 본다.          


  ‘부모도 사랑받고 싶다’의 저자인 이호선 박사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 번도 부모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아이 둘을 키우고 있지만 이전에 부모였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투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난생처음 ‘엄마’와 ‘아빠’라고 불리는 부모들이 끊임없이 부모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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