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 한 번의 경험이 바꾼 것들

꿈은 종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란다.

by 유타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뿐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고등학교는 흔히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하는 시기’로 여겨진다. 체험이나 활동은 종종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된다. 성적 관리에 도움이 되는지, 입시에 직접 반영되는지를 먼저 따지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배움은 교과서 안에 갇혀버리곤 한다. 하지만 교사로서 나는 확신한다. 어떤 학생에게는 교실 바깥에서의 단 한 번의 경험이, 진짜 공부의 이유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반 정효(가명)는 평소 조용히, 성실하게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성적도 괜찮았지만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서울대학교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캠프 모집 공고를 접했고, 망설이다 결국 지원서를 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전국의 이공계 진로 희망 학생들이 몰리는 경쟁률 높은 캠프였다. 우리 학교에도 관심 있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원 일정이랑 겹친다”며 신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효만이 유일하게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며칠 뒤 캠프를 다녀온 정효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서울대 물리학과 선배들과의 대화, 소규모 토론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관심사가 구체적인 진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감한 듯했다. 교실로 돌아온 이후, 쉬는 시간에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책상을 일부러 교실 벽 쪽으로 옮겨서 돌려 앉고, 헤드셋을 낀 채 조용히 문제를 푸는 그 모습은 말없이 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어느새 고3이 된 정효는 서울대 물리학과 진학을 꿈꾸며 성실하게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성적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무엇보다 ‘이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학습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다른 예는 김세현이라는 여학생이다. 방학을 앞두고 무료 해외 연수 프로그램 공지가 올라왔고,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참가 인원은 학교당 한 명이었고, 지원 자격엔 일정 수준의 성적 기준이 있었다. 세현이는 성적으로만 보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놀랍게도 합격 통보를 받은 건 세현이었다. 알고 보니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방학 때 학원에 빠질 수 없다”며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우리 학교에서 성적 상위권이 아닌 학생이 미국에 다녀오게 된 것이다.


그 뒤 세현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선생님, 저 꼭 미국에서 살 거예요.”
그 말은 단순한 여행의 감상이 아니었다. 학교로 돌아온 뒤, 영어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수업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수업 경험이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것이다. 무엇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태도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성장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몇 해 전, 현장체험학습으로 3박 4일간 제주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일정은 여행사와 조율해서 짰지만, 나는 한 가지를 끝까지 고집했다. 바로 ‘성산일출봉’을 일정에 넣는 것이었다. 많은 여행사들이 성산일출봉 대신 실내 공연이나 카트 체험 같은 프로그램을 넣으려 했다. 성산일출봉은 입장료가 저렴해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반 아이들과 함께 그 정상에 올라가 분화구가 보이도록 인증샷을 꼭 찍고 싶었다. 결국 일정에 포함시켰고, 우리는 무더운 날 땀을 흘리며 정상까지 걸어 올랐다.


내려오는 길, 김민호라는 학생이 조용히 다가왔다. 민호는 이번 체험학습에서 성산일출봉 담당 가이드를 맡았던 친구였다. 제주도에 가기 전, 나는 학급회의 시간에 체험 일정 중 의미 있는 장소 몇 군데를 정하고, 각 장소에 대해 조사하고 현장에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학생 가이드를 미리 정해두자고 제안했었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성산일출봉만큼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결국 학급 임원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했고, 이에 진 민호가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민호가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저 진짜 여행 가이드 한번 해보고 싶어요. 여행 책 쓰는 작가도 해보고 싶고요.”
뜻밖의 말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민호는 말을 이었다.
“그동안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도 잘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제가 조사한 걸 친구들한테 설명하면서 뭔가 막 심장이 두근거렸다고 해야하나? 이런 기분 처음 느꼈거든요. 나중에 내가 보고 느낀 걸 글로 써서 누군가 그걸 읽고 여행을 떠나면, 그건 진짜 멋진 일일 것 같아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민호는 조용히 덧붙였다.
“반 전체를 이끄는 건 살면서 처음해봤어요. 너무 뿌듯했어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 졌고, 처음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냥 막연히 대학 가야지 했던 때랑은 달라요. 이제는 진짜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그 이후 민호는 교내 글쓰기 대회에 참가했고, 국어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다. 여행에서 비롯된 작고 낯선 감정이 진로의 방향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나는 이 모든 장면을 교실 안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책과 수업을 잠시 내려놓은 그 짧은 시간, 교실 바깥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누군가는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에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체험이나 활동은 입시와 거리가 멀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공부는 앉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진짜 배움은 체험을 동반할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기 없는 노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목표 없는 공부는 쉽게 지친다. 그리고 그 목표는, 교실 바깥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는 물리학자를 꿈꾸며 조용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가 있고, 지구 반대편을 상상하며 단어장을 넘기는 아이가 있으며, 여행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문장을 써 내려가는 아이가 있다. 그 모든 시작은 ‘한 번의 체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체험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단 한 번의 활동이 한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장면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교실은 작지만, 아이들의 삶은 그보다 훨씬 넓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경험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공부의 시작이 될 수 있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언어폭력, 나는 장난이었지만 너는 상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