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수, 너만의 속도로 가는 길
올해 초 1월, 고3 졸업식이 끝난 직후였다. 교무실 복도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윤환(가명)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저 올해 수능 다시 도전하려고요.” 평소 말수가 적던 아이였고, 학기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늘 집중하는 눈빛을 잃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 학생이 먼저 내게 와서 말을 건넨다는 건 그 자체로 각오가 느껴지는 일이었다.
"점수가 좀 아쉽기도 하고, 사실 대학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그냥 되는 대로 대학교에 가기엔 너무 아쉬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다.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큰 결심 했다."
그러자 윤환이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려요. 그냥 붙은 데 가라고, 재수한다고 잘 될 것 같냐고 말이에요. 근데… 제대로 다시 해보고 싶어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부터 공부해서 그런가, 할수록 시간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특히 수학은 고3 여름방학 때부터 뭔가 감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두세 달 안에 실력을 올리기엔 너무 부족했어요. 올해 다시 도전해 볼 거예요.”
그 순간 나는 아직 10대인 윤환이가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줘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스스로 더 잘하기 위해 재수를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고등학생에게 그 1년은 세상의 끝처럼 느껴질 수 있다. 대학 입시라는 압박감, 친구들이 먼저 대학에 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 부모님의 기대와 시선 속에서 ‘재수’는 마치 실패처럼 비치기 쉽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달리하면, 그 1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몇 년간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고, 직장 생활을 하다 전공과 무관한 길로 진로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서른이 넘어서야 자신의 길을 찾기도 한다. 나는 스물아홉에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가 되었고, 또 다른 친구는 서른넷에 대학원에 진학하며 전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선택을 늦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고등학생의 ‘재수’만은 좀 엄격하게 보는 것 같다. 그 나이에 실패하면 안 된다거나, 남들보다 늦어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만든 시선일지도 모른다.
재수를 결심한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들이 있다. '내가 이걸 또 견딜 수 있을까?',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까?'같은 생각들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불안이 곧 용기라고 생각한다. 불안하다는 건, 그만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는 건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증거다.
몇 년 전에도 그런 학생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수능은 잘 보지 못해서 정시로도 원하는 곳을 지원하는 게 무리였던 상황이었다. 그 학생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교무실에서 정시 상담을 하려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나는 그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몇 분의 침묵 끝에 아이가 말했다. “이제 뭐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아이는 결국 다시 공부하는 걸 선택했고, 2년의 시간을 거쳐 그토록 원하던 학과에 진학했다. 지금은 연락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 학생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십 대에게 1년은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그 시간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의 선택이 평생을 결정짓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라는 시점은, 더 좋은 선택을 위한 준비가 될 수도 있다. 재수는 누군가에게 단지 점수를 다시 올리는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을 다시 정돈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재수를 선택한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고, 이 선택은 내 인생의 한 조각일 뿐이다.”
조금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괜찮다. 그 길이 결국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지금 다시 걷는 이 길이, 언젠가 너를 더 멀리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