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선택하지 못했다
물음표가 없으면 느낌표도 없다.
-이어령-
“선생님, 저는 딱히 가고 싶은 학과는 없어요. 저 어디 지원할까요?”
무더운 여름의 교무실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수시 원서 접수가 가까워진 탓이다. 고3 담임을 맡은 교사라면 누구나 이 시기에 한 번쯤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선생님, 그냥 제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교 좀 알려주세요.” 이 말속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고민의 생략, 체념의 기운, 그리고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진로 결정의 기이한 구조 같은 것들이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은 짧다. 수시 원서를 쓸 준비를 해야 하고, 생활기록부를 마무리해야 하며, 수능 점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분주한 시간 속에서 많은 학생들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보다는 '내가 가진 점수로 갈 수 있는 학과가 뭘까?'라는 질문이 먼저 머리를 차지한다.
“전 인문계라서요. 성적 맞는 데 중에서 상경계열이나 사회계열 정도 생각 중이에요. 딱히 가고 싶은 학과는 없어요. 그냥 이름 있는 학교면 좋겠어요.”
학생들은 자기 진로를 결정하는 시점에 서 있지만, 정작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진로를 선택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진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점수가 나를 데려가는 곳으로 따라가는 구조 속에서 대부분은 마치 '배정'되듯 미래를 결정한다.
이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 가지 이유는 명백하다. 입시 제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입 전형은 점수를 기준으로 서열화된 대학 순위를 제시하고, 학생은 그 위에서 가능한 선택지를 좁혀 간다. 여기서 '가능한'이라는 말은 곧 '성적에 맞는'이라는 뜻이다. “선생님, 여긴 과는 마음에 안 드는데 학교 네이밍이 좋아서요. 일단 써볼게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는 게 바로 그런 구조의 증거다.
물론 학생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부족하고, 입시는 언제나 경쟁이다. 게다가 '좋은 대학'이라는 사회적 환상이 아직도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진로와 적성을 고민하기엔 현실은 너무 빠르게 달려간다. 이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험 점수라는 숫자로 진로를 결정짓는 문화는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그 정도와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압축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제가 수학교육과 가고 싶었는데, 사범대 가기엔 성적이 안 나와서요. 수학과도 간당간당하고... 수학은 좋아하지만, 교사는 이제 좀 어렵겠죠.”
이 학생은 처음엔 수학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점수를 보며 꿈을 수정했다. ‘수정’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조용하고 체념 섞인 목소리였다. 교사로서 나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수학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학생은 이미 ‘점수가 허락하는 범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 점수로 00 대학교 수학과는 가능해. 일단 합격하면 열심히 해서 복수전공으로 수학교육과 하면 좋지 않을까?”
“글쎄요... 그 대학교는 가고 싶지 않아요.”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저 좋아하는 것조차, 대학 순위 아래로 밀려나는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몇 년 간 교육 현장에서는 ‘진로 탐색’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학생들은 진로 수업을 듣고, 적성 검사를 하고, 관련 교과 활동을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순간이 오면, 이 모든 것은 다시 ‘점수’라는 잣대 앞에 무력해진다. 진로는 이상이고, 입시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길보다, 누군가 미리 그어둔 길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길을 걸으면서 점점 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진로는 점점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리고, 학과 선택은 대학교의 이름 아래 압축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학생들이 단지 ‘될 만한 곳’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선택할 수 있는 구조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대학의 서열은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디에 가느냐’보다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한 사회였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고 응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진로는 미래의 직업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설계하는 일이다. 그런데 고3이라는 시기는, 오히려 그 설계를 방해하는 시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입시가, 경쟁이, 점수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진로는 내가 선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선택한 점수를 따라가는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들의 진심이 묻히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