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친해서 괜찮다는 착각에 대하여...
“말은 칼보다 날카롭다. 그 칼은 혀 끝에 달려 있어서, 상처는 깊은데 흔적은 없다.”
- 드라마 '열혈사제' 중에서 -
“언니, 우리 반 애들이 학폭 가해자로 신고당했어. 나 교사 되고 학폭 처리하는 거 처음이잖아. 완전 멘붕상태야.”
오랜만에 전화한 후배의 목소리엔 당황과 무거움이 뒤섞여 있었다. 특히 가해학생 중 그 중심에 있었다던 진욱(가명)이라는 아이는 피해 학생을 지속적으로 놀리는 말을 해왔고, 어느 날 밥 먹다가 던진 말 한마디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게임할 때 상대방을 비하하는 그런 말이었는데, 피해 학생 부모님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바로 학교에 연락했어.”
게임을 안 하는 나 조차도 어느 정도 의미를 알 수 있는 그런 말이었고 진욱이는 그냥 친구끼리 장난한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겐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후배는 진욱이가 평소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께 예의도 바른, 말하자면 ‘문제없어 보이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진욱이가 속해 있던 친구 무리 역시 꽤 괜찮은 아이들이었고, 그래서 주변 아이들도 그 상황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냥 장난 같은 분위기였어요. 진심은 아니었고요.”
이 말이 그 아이들이 내놓은 거의 유일한 해명이었다.
나는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교사로 일하며 수없이 들어본 말이었다. “장난이었어요.” “우린 친해서 그런 거예요.” “쟤도 웃었잖아요.”
이 말들이 무서운 건, 아이들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말이 칼이 될 수 있다는 걸, 자신은 단지 웃자고 던진 말이 상대에겐 하루를 망치고 자존감을 짓누르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안타깝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건, 이제 학교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물리적 폭력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 말이 폭력이 되고, 표정과 태도, 비꼬는 말투, 단체 채팅방 속 은근한 무시가 교실을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말은 휘발성이 강한 듯 보이지만, 들은 사람의 마음에는 유독 오래 남는다. 특히 그 말이 집단에서 반복될 때, 한 아이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전문 강사도 부르고, 영상도 보여주며, 실생활 사례도 소개한다. 그러나 아이들 눈에는 그것이 ‘시험에 안 나오는 시간’으로만 보이는 걸까? 형식적으로 지나가는 교육, 누구 하나 진지하게 듣지 않는 분위기... 말로 다치지 않으려면 말의 무게를 아는 훈련이 필요하건만, 아이들은 아직 그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한 상태다.
그날 후배는, 진욱이 어머니의 반응도 전해주었다.
"자기 아들이 그냥 반 친구한테 장난친 건데, 그게 학교폭력으로 신고할 일이냐고, 오히려 피해 학생이 정서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고. ”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도 자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장난’이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언어폭력은 늘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친하니까 괜찮고, 웃었으니까 괜찮고, 남들도 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체 누구의 기준일까. 아이들이 무심코 따라 쓰는 유행어, 밈, 줄임말 속에는 사실 성차별, 혐오, 조롱이 담겨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온라인 문화에 무심코 휩쓸려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말에도 윤리가 있다는 걸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쓰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한 적이 많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단지 말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어떤 배경에서 그런 말이 만들어졌는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어떤 감정이 들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게 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을 키우지 않고는, 어떤 교육도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믿는다. 가해 학생도, 피해 학생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친구들도 모두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십 대는 처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수를 통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는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후배와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한참 동안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교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장난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상처로 남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아이들의 말을 듣는다. 그 말에 담긴 농담과 표정 너머,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마음의 진동을 읽어내기 위해 애쓴다. 그 말이 누군가를 웃게 했는지, 아니면 울게 했는지 조용히 짚어보며, 때로는 그 자리에서 함께 멈춰 서는 것도 교사의 몫이라 믿는다.
나는 아이들이 언젠가 ‘장난이었어요’라는 말 뒤에 숨는 대신, 자신의 말이 어떤 무게로 닿는지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마음에 발을 디딜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말 앞에서 멈춰 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서툴고 어설퍼도 괜찮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말이라면, 그 말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그 역할을 학교와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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