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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Jan 08. 2020

신데렐라가 되어 쓰는 글

아이를 재우다 나까지 잠이 든 날은 낭패다. 한 차례 단 잠이 지나가고 새벽 세 시쯤 잠이 깨면 얕은 잠 속에서 자기 전 마무리하지 못했던 미션들을 안타까워한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해치우고 다시 잠을 청할까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대게는 포기하고 마음 편히 잔다. 대부분의  일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제때 안 한다고 나무랄 사람이 없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나 자신 외에는.

글쓰기가 미루어진 날은 얘기가 좀 다르다. 마른 빨래를 개지 않았거나, 재활용 쓰레기 정리가 미뤄진 날은 내일 아침 할 일이 하나 추가된 것뿐이다. 글 쓰기가 미뤄진 날은 단숨에 오르려던 계단 중간에 멈춰 선 기분이다. 잘 올라가던 추진력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 날은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한다.

어둑한 방에 누워 눈을 감은 채로 쓰고 싶었던 문장들을 허공에 채워 나간다. 아침이면 지워질 문장들이다. 종이와 펜이 없고 노트북도 열지 않았지만 이런 날은 일필 휘지다. 마치 놀라운 이야기꾼이 된 것처럼 문장이 뭉개 뭉개 피어오른다. 반쯤 수면 상태의 이런 글은 글인지 꿈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라도 머릿속에 문장을 쌓는 이유도 그래서 이다. 오늘은 마음에 크게 빚을 졌다. 100일의 글쓰기 도전 이후 발행을 했다가 취소한 일은 있었어도 아예 발행 버튼을 누르지도 못했던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변명을 하라면 이유는 충분하다. 아침 일찍 일어났어도 아이의 외부 견학이 있는 날이라 등원 준비가 분주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도 등원한 후 넓은 집에는 나와 산재한 집안일이 마주했다. 거실과 안방, 아이방, 서재까지 정리하고 쓸고 닦는다. 설거지는 미뤄두고 시계를 보니 필라테스를 가야 한다. 필라테스를 마치고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본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아이에게 불고기를 만들어 먹을 계획이다. 쌈을 크게 싸서 마구마구 입에 넣으며 신나게 먹을 생각에 신이 난다. 집에 도착해 미뤄둔 설거지와 나의 식사를 마치자 드디어 글 쓸 시간이 생겼다. 야호를 부르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시장 봐오는 길에 꼭 쓰고 싶은 소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장을 마구 써 내려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언니다. 자매는 할 얘기가 길다. 한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쉽게 막기가 힘들다. 마음을 툭 터놓을 이런 시간이 그리 자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 대화를 이어가던 중 시계를 보니 아이 하원 할 시간이다. 오늘 견학 가서 많이 울었다던데 얼른 달려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아직 글은 완성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의 시간들을 나열해보니 빡빡한 날이다. 어쩌면 글을 쓰지 못한 핑계이지만 놓칠 수 없는 일상이기도 하다. 이런 날은 내가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되었다고 상상하곤 한다. 나는 열심히 살림하고, 공부도 하며 글도 쓰는 발랄한 주인공인 것이다.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에게 작가의 꿈이 있었다면 나처럼 글을 썼을 것이다. 설거지하다가 걸레로 바닥을 박박 닦다가 글감이 떠오르면 잊기 전에 식탁 위에 펼쳐둔 노트에 한 줄 쓰러 달려갔을 것이다.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한 줄 써둔 문장에 살을 부쳤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날이라고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설거지하며, 엘리베이터를 타서 잠시의 시간 문장을 떠올리는 나를 발견한다. 이쯤이면 부담이 큰가 싶다가도 괴롭지 않으니 부담보다는 신이 난 상태에 가까운 듯하다. 글쓰기 재동이 걸린 오늘 같은 날도 아쉽기는 하지만 멈추지 않았으니 괜찮다 다독인다.

못다 쓴 글을 변명처럼 쓰고 나니 해가 뜬다. 잠시 작가가 되었던 신데렐라는 엄마로 변신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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