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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Jan 13. 2020

체온계 하나 없이 엄마는 나를 어떻게 지켰을까


머리가 아프면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내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며 열이 있나 없나 살폈다. 엄마가 “열나네” 말하면 열이 있는 것이었고, “안나네” 말하면 괜찮은 것이었다. 엄마 손에 온도계가 달렸을 리 없지만 엄마 손바닥에 내 체온을 맡기며 어린 날의 열을 견뎠다.

어려서는 고열이 나는 날이 많았다. 고열이 나는 날은 꿈같은 환상을 보기도 했다. 온 식구가 방 안을 둥둥 떠다니며 밥 먹고, 빨래하던 환상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앞집 철이네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머리가 아파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다. 할머니는 아랫목에 자리를 펴주며 누워 있으라 했다. 내가 누운 자리 옆에서 온 식구가 저녁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열이 펄펄 끓어 눈은 잘 떠지지 않았다. 밥 먹던 식구들이 밥상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더 위로 붕붕 날아올랐다. 눈은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엄마는 아픈 나를 택시에 태워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 침대는 차가웠고 팬티 바람으로 누워 온 몸을 알코올인지 물인지 흥건하게 적신 수건으로 닦아내는 간호사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을 추위에 오들오들 떨자 열이 떨어졌다.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을 때쯤 병원을 나왔다. 한밤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도 없어서 엄마는 병원 옆에 살던 큰 이모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큰 이모네 집에 가면 야식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메추리 튀김이나 곰장어 구이를 대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어리고 입이 짧은 나는 손도 데지 않았다. 저녁도 못 먹었으니 한입 먹으라며 이모가 재촉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 고소한 깨죽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픈 날 큰 이모는 제일 먼저 문 여는 죽장사에게 가서 깨죽을 사 오곤 했다. 이모가 사준 깨죽을 먹고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가는 첫차를 타러 갔다. 아련하고 좋았던 기억이다.




귓속 체온을 정확히 재는 체온계에 종류별 해열제를 준비해 놓고도 아이의 열은 두렵다. 어린날 엄마는 아무런 도구와 약이 없어도 의연해 보였는데. 그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열 살도 넘게 어렸다. 열이 나는 날이 무서웠던 기억보다 아련하게 그리운 추억이 된 건 아마 엄마가 의연하게 나를 지켰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의 열을 지킨 며칠 밤을 보내며 나는 얼마나 두려웠는지 생각한다. 단단하게 엄마로 서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어렸던 엄마는 어떻게 나를 지켜냈을까 생각하니 엄마만 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싶어 먹먹해진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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