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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17. 2019

서른일곱 살에 다시 공주가 되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되던 어느 날이다. 그날은 드디어 왈츠를 배우게 됐다. 1시간을 발레 바에 의지해 기본 동작들을 연습한 후 교습소의 홀 전체를 사용하는 플로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피아노를 배울 때 바이엘, 체르니 같은 연습용 곡을 연주해야 베토벤도 치고, 쇼팽도 칠 수 있다. 긴 연습을 통해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발레도 연습용 음악이 있었다. 일정한 리듬과 동작에 짧은 멜로디가 더해진 곡이다. 3개월을 단조로운 리듬의 같은 곡들만 반복해서 들으며 기본 동작을 익히다가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자 쇼팽을 만난 것처럼 두근거렸다.

쿵 짝짝, 쿵 짝짝

볼륨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며 스텝을 밟아야만 할 것 같았다. 선생님이 먼저 음악에 맞춰 오늘 배울 왈츠를 추었다. 드디어 춤다운 춤을 추는구나. 수강생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모으고 발 끝으로 서서 음악이 시작되길 기다리다가 음악이 흐르면 리듬에 맞추어 오른발부터 내디뎠다. 쿵에 오른발 다시 쿵에 왼발 끝을 오른발 뒤꿈치에 붙이고 짝에 오른발을 옆으로 뻗는다. 발의 동작에 맞추어 팔을 뻗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저어주면 됐다.

처음부터 쉬울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동작의 순서들로 가득 차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로봇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비슷할 것이다. 선생님은 음악을 끄고 우리를 모이도록 했다. 우리의 연습 동작이 그렇게 실망스러웠을까? 걱정을 한가득 안은 채 긴장했다.

“무도회장의 공주가 어떻게 춤을 출까요? 이번에는 공주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느낌대로 춤을 춰보세요. 발동작이 조금 틀려도 춤을 춰보세요. 발레는 춤이에요.”

선생님의 주문대로 드레스를 입은 나를 상상하며 최대한 우아한 표정과 손동작으로 허우적거렸다. 여전히 어눌한 동작은 우스꽝스러웠지만  기분만은 공주 그 자체였다.

어른이 될수록 공주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오죽하면 공주병이란 말도 있지 않나. 못 볼 꼴이고, 재수 없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공주가 되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발레를 배우는 두 시간만은 공주가 되어야 했다. 표정, 손 끝도, 눈빛도, 발 끝도. 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주문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게 춤은 다듬어지고, 동작이 리듬 위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공주가 되는 두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그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 수업은 늘 기다려졌다. 어느 날 문득 처음 발레 교습소에 처음 갔던 날의 내가 떠올랐다. 늘 머리가 아팠고, 표정이 어두웠던 나.

‘두통은 어떻게 된 거지?’

거짓말처럼 머리가 아프던 나는 없고, 고개와 턱을 꼿꼿이 든 내가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일해도 좋았다. 괴롭던 시간을 견뎌낼 힘이 생겼다. 퇴근 시간 회사를 나서는 순간 신데렐라처럼 구두를 벗고 발레슈즈를 신으며 공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 아는 공주의 이중생활을 하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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