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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19. 2019

맛있는 반찬만 먹어도 괜찮아

행복을 선택하는 태도에 관하여

내 수첩에는 위시리스트가 빼곡히 적혀있다. 꼭 해보고 싶은 일, 읽고 싶은 책, 가보고 싶은 맛집, 보고 싶은 영화 등이다. 위시리스트가 많으면 왠지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하고 든든했다. 앞으로 해볼 게 많다는 사실은 미래를 위한 적금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해본 것들은 줄을 좌악 그어 놓는다. 빼곡한 리스트 사이에 듬성듬성 줄이 그어지긴 했지만 모두를 이루지는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좀 더 여유되면 하려고 같은 이유로 미루어둔 것이다.

아이와 식사시간이면 늘 실랑이를 벌이는 대목이 있다. 엄마 마음에는 골고루 먹이고 싶어 이것저것 반찬들을 담아주어도 아이는 늘 먹고 싶은 것만 먹었다. 제일 먼저 손이 가는 것은 당연히 생선, 두 번째는 소시지다. 밥도 먹지 않고 생선 접시가 빌 때까지 핥아먹는 아이를 보며 어떻게든 숟가락에 밥을 얹어 입으로 밀어 넣어 본다. 아이는 마지못해 받아먹기도 하지만 대부분 밀쳐내고 먹고 싶은 것에 집중했다. 먹는 습관도 희한해서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모조리 먹은 후에야 다음 순위 반찬을 먹었다.

“율, 생선만 먹을 거야? 시금치도 먹어야지”

“싫어 싫어. 생선~~”

“그럼 생선 먹고 나서 시금치 먹을 거야?”

“응. 생선이 제일 좋아!”

나중에라도 시금치를 먹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먹고 싶은 대로 먹도록 내버려 둔다. 약속을 받았지만 먹기 싫은 건 안 먹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와중에 나는 오늘 안 먹으면 쉴 것 같은 나물반찬부터 먹는다. 제일 큰 생선은 아이 몫, 그다음 잘 구워진 건 남편에게 내건 그중 제일 작고 살집이 없는 것을 고른다. 어떤 날은 생선 반찬에는 젓가락을 대지도 못할 때도 있다. 나도 생선 엄청 좋아한다. 고기 잡는 아빠 딸인데 아무렴.

이 대목에선 엄마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 숙제에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오는 내용이 있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은 매운탕.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인데 엄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딸이 그것도 하나 모른다는 게 부끄러워 엄마께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아빠께 물었다.


"아빠, 엄마는 무슨 음식 제일 좋아해? 이거 알아오는 게 오늘 숙제야"

"엄마? 나물 좋아해. 산나물이라고 써 가."


실제 엄마는 나물을 좋아하시긴 했다. 그렇지만 치킨도 좋아하고, 짜장면도 좋아하셨다. 그 유명한 짜장면도. 하지만 치킨이나 짜장면을 그릇째 엄마 앞에 놓고 식구 중 제일 많이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떡볶이가 상에 오른 날이면 엄마는 우리 딸 좋아하는 거 많이 먹어 라며 내 앞에 밀어주셨는데 엄마에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식구들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 엄마의 사랑이었단 걸 안다. 하지만 엄마를 떠올릴 때 좋아하는 음식을 신나게 먹던 모습이 그려졌다면 더 행복한 기억일 것이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마찬가지다. 좀 더 여유 생기면 해야지. 시간이 좀 나면 해야지. 나중에 같은 말들로 미루는 건 현재 내가 이고 지고 가는 일들에 대한 배려였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현실이 늘 행복한 일들로 가득한 건 아니었다. 


율이의 밥 먹는 태도는 엄마의 욕심만 벗어난다면 칭찬받을만한 모습이다. 맛있는 게 있으면 제일 먼저, 끝까지 다 먹고 나머지를 먹는 것은 기특하다. 아이는 역시 겁이 없고, 정직하며 그래서 지혜로울 때가 많다. 살아가는 동안의 우선순위도 먹는 것처럼 좋은 거, 하고 싶은 거 먼저 해내는 삶이면 얼마나 충만할까. 


마흔 살에 관해 쓴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으며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되는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한 소감을 적느라 글이 여기까지 왔다.

훗날 내 아이의 기억 속에 그려질 나는 하고 싶은 건 망설임 없이 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는 맛있는 반찬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번쩍 떠오르도록 오늘부터 나도 맛있는 반찬부터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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