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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20. 2019

어쨌든 후퇴하지 않는다



“엄마도 같이 가자”

“그래,율아. 그런데 우리 율이 말을 엄청 잘하네~”

“뭘~~”

세 살 율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말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띄엄띄엄 단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의태어가 난무하던 대화가 아닌 정확한 문장을 말한다. 엄마의 칭찬에 능청스러운 대답까지 해낼 만큼 자랐다. 우리 율이가 언제 이렇게나 컸지 싶어 순간 속에 뜨거운 것이 몽글거린다. 아이의 성장은 비 온 뒤 쑥쑥 자라나는 새싹과 다를 바 없다. 빠르고, 싱그럽고, 놀랍다. 이 무렵 온갖 후퇴하는 감각을 끌어안고 괴롭던 나는 전진만 아는 아이의 성장을 보며 감탄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후퇴하는 감각이 많아졌다.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지만 성장보다는 후퇴가 익숙해지는 나이는 낯설고 서글프다. 시력이 나빠지거나, 무릎이 시원찮거나, 자주 깜박깜박하는 신체적인 변화도 서글프지만 그것보다 어쩌면 별 것 아닌 것 앞에서 서글픔은 요란했다. 그중 하나는 ‘다리 찢기’다. 두 다리를 앞으로나 옆으로 어쨌든 일자 모양으로 쭉 찢는 것.

초등학교 때 친했던 주야는 온몸이 유연했다. 손마디 관절이 앞뒤로 부드럽게 꺾이는 것은 물론 엄지손가락이 같은 쪽 손목까지 닿는 기인 같은 재주도 신기했다. 주야의 유연함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다리 찢기였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로 가서 일자로 쭈욱 다리 찢기 시범을 보였다. 친구들은 너도나도 다리 찢기 도전을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의 관절과 근육은 부드러워 성공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뻣뻣함을 타고난 탓에 시옷(ㅅ) 자가 도저히 늘어나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물론 후자였다.

이런 나의 다리 찢기는 나이가 들수록 후퇴했다. 되지 않는 것을 굳이 애써서 할 리 없었고 자라면서 유연성이 필요한 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던 성장을 마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퇴하는 감각을 다시 성장시킨 기회는 발레를 하면서였다. 발레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무시무시한 스트레칭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수업이 끝난 후 스튜디오 구석으로 수강생들이 모이면 선생님은 한 명씩 돌아가며 스트레칭을 도와주었다. 그 시간은 특히나 두려웠다. 대부분이 나처럼 뻣뻣한 성인들이었기에 공포의 시간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몇 번 경험한 그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은 두렵고 피하고 싶었다. 내 앞 순서에서 극적으로 선생님을 찾는 다급한 전화가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벽에 기대앉아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앉으면 일단 시작할 때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때부터는 약간의 오기와 끔찍한 고통이 찾아온다. 마주 앉은 선생님은 나처럼 두 다를 벌리고 내 두 발목을 벽 쪽으로 밀기 시작한다. 가랑이가 찢어질 것만 같아 오버해서 엄살을 피워도 봐주지 않는다. 여기서 끝나면 공포의 스트레칭이 아니다. 뒤로 밀리는 만큼 다리를 찢고 나면 그 후에는 상체를 앞으로 접는다. 손을 앞으로 1밀리미터씩 밀며 바닥으로 가다 보면 등을 누르는 선생님의 손바닥이 느껴진다. 시지프스가 들었던 돌덩이가 이만큼 무겁고 두려웠을까. 약 2분간 진행되는 스트레칭 시간이 영겁 같다. 이 고통을 넘어서면 분명 이전보다 유연해졌다. 다리가 1센티미터씩 더 벌어지는 기쁨은 중독에 가까웠다. 다음날 다시 두려움을 이기고 고통의 다리를 건너 유연함과 손잡고 춤출 용기를 주었다.

언젠가 다리를 일자로 찢게 되는 날을 맞이하기 위해 과감히 고통 속으로 나를 던졌다.

오늘 내게 가장 두려운 시간은 글을 쓰는 아침이다. 읽던 책 속의 탐날 만큼 멋진 문장에, 감탄을 자아낼 만큼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 앞에 늘 빈곤한 나의 실력과 생각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자라도 쓸 수 있는 것은 쓸 시간을 정해놓은 규칙만은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글 쓰기를 시작하면 역시 고통이다. 글감을 찾는 것부터 전개가 쉽지 않은 글의 흐름까지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매일 두려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고 고통과 마주한다. 유연함의 마법은 다리를 찢으려는 자에게 언젠가는 다가온다는 후퇴하지 않는 법칙을 믿기 때문이다. 일자다리를 쭉 뻗게 되었을 때의 성취감은 예전의 고통에서 통쾌한 승리를 맛볼 만큼 행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오늘의 글을 쓰게 한다. 오늘도 후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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