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유는 늘 가짜 이유 뒤에 숨곤 했다
몸이 아픈 날은 필라테스 하러 가기 싫다. 근육통과 으슬으슬 감기 기운까지 덮친 어제 아침이 그랬다. 오전의 수업은 이미 인원이 꽉 차 나는 여전히 대기 순번 1번이었다. 안 그래도 가기 싫던 차에 수업을 빠질 구실을 찾았다. 예약을 취소할까 말까 몇 번을 번복하는 사이 내 앞의 예약자들이 취소해 내 자리가 났다. 열명 한정인 수업에 내 자리가 생겨버렸으니 빠질 구실이 사라졌다. 빈틈없이 인원체크를 해내는 예약 어플에 배신감이 들었다. ‘예약 어플이 오류라도 났으면 오늘 운동 홀가분하게 빠지는 건데’ 할 수 없이 운동복 위에 회색 롱 패딩을 입고 마스크까지 끼고 차가운 공기 속을 걸어 필라테스 스튜디오가 있는 빌딩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인사를 한다. 검은색 롱 패딩을 모자까지 쓴 젊은 여자다. 딱 봐도 오늘 같은 수업을 들을 회원인 것 같았다. 회색 패딩을 입은 나와 검정 패딩을 입은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눴다.
회색 패딩: 아, 안녕하세요.
검정 패딩: 으으~ 오늘 춥네요.
회색 패딩: 그러게요. 운동 오기 싫어 혼났어요.
검정 패딩: 얼마나 다녔어요?
회색 패딩: 8개월쯤.
검정 패딩: 꽤 다니셨구나. 어때요?
회색 패딩: 필라테스요? 재밌어요.
검정 패딩: 나랑은 안 맞는 거 같아요. 관둘까 생각 중예요.
회색 패딩: 왜요? 도움이 별로 안 돼요?
검정 패딩: 몸무게가 3kg이나 늘었어요.
회색 패딩: 근육량이 늘어난 게 아닐까요?
검정 패딩: 아닐 걸요. 내가 요즘 저녁 약속이 많아서 좀 먹기도 했지만.
회색 패딩: 아아..
검정 패딩: 그렇다고 3kg이나 느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검정 패딩의 여자는 본인의 체중이 늘어난 다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필라테스에 게을러지는 이유를 거기서 찾았다. 우리는 각자의 패딩을 라커룸에 걸어놓고 필라테스 수업을 받았다. 강사님은 금요일의 수업답게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경쾌한 팝 음악과 강사님의 구령에 맞춰 푸시업을 하고, 밸런스를 잡고, 스쿼트를 했다. 아침의 근육통이 이미 풀리고 새로운 근육통이 뒤덮일 만큼 호된 수업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업을 마치고 나니 으슬으슬하던 감기 기운도 도망을 가고 없었다. 오히려 개운해진 몸과 기분으로 땀을 닦고 추운 몸 위에 얼른 회색 패딩을 걸쳐 입었다. 검정 패딩을 입은 여자가 라커룸 밖에서 강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검정 패딩: 강사님, 나 왜 살이 더 쪄요?
강사: 근육량이 늘면 살이 빠져도 몸무게는 늘 수 있어요.
검정 패딩: 아니~ 나 여기, 등 살이 찌는데.
강사: 회원님, 식사 조절도 하세요?
검정 패딩: 따로 안 하는데.
강사: 운동해도 식사조절 안 하면 살은 쪄요.
검정 패딩: 아니, 그게 아니라 필라테스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요.
강사: 그러시구나. 그런데 저도 다이어트해요.
검정 패딩: 허? 강사님이 다이어트할 게 어딨어요.
강사: 다이어트해서 겨우 이 정도 유지하는 거예요.
검정 패딩: 아예 안 먹어요?
강사: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점심때 되기 전까지는 안 먹어요.
검정 패딩: 간헐적 단식이요?
강사: 비슷해요.
검정 패딩: 다이어트하는구나.
강사: 회원님 충분히 운동 잘하고 계세요. 음식조절 조금만 신경 써보세요.
검정 패딩: 네네. 이제 저녁 모임 좀 줄여야겠네요.
3kg이 늘어난 이유는 이제 검정 패딩의 그녀도 알고 우리의 강사님도 알게 되었다. 강사님은 작게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오는 길 반대편에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여자가 총총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필라테스 수업에 빠질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검정 패딩의 여자와 회색 패딩의 나를 떠올리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둘 다 게을러지려고 찾은 이유들에 어떻게든 배신을 당했다. 진짜 이유는 늘 가짜 이유 뒤에 숨곤 했지만 이번엔 안 통했다. 운동이 익숙해지고 나면 나른한 게으름이 찾아오곤 했다. 이번에는 게을러지긴 글렀다. 검정 패딩 여자의 들통난 가짜 이유도, 나의 가짜 이유도 이번에는 졌다. 월요일에는 다시 의지를 불태운 회색 패딩의 나와 검정 패딩의 여자가 필라테스 스튜디오에서 만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