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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Dec 01. 2019

플랜 B는 있다



회의를 진전시키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은 해답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 많다면 회의는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슈의 끝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집요한 사람이 많을수록 회의 시간은 길어지고 힘이 빠져 활활 타던 의지는 불씨가 사그라든다. 물론 꺼져가는 불씨는 다시 보면 살릴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회의를 접고 각자의 불 쏘시개를 찾아 다시 모이면 될 것이다. 이 다양한 유형들 중 오늘 내가 주목하는 유형은 포기가 빠른 타입이다.


나의 광고회사 보스였던 N실장은 전형적인 포기가 빠른 사람이다. 그가 주제 하는 아이디어 회의는 진이 빠지기로 유명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가 아니라 아이디어 통과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회의에는 카피라이터인 나, 담당 디자이너 두 명, 그리고 N실장이 참여한다. N실장을 제외한 세 사람은 당일 새벽까지 고민하며 회의 시간에 낼 아이디어를 생산했다. N실장의 역할은 우리가 펼쳐놓은 아이디어를 듣다가 ‘어 그거 한번 발전시켜 봐’라고 하거나 ‘다음 거’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까다로운 사람답게 그의 입에서 ‘그거 한번 발전시켜 봐’는 듣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음 거'를 많이 준비할수록 유리했다.


그날도 새벽까지 '다음 거'를 있는 대로 끌어모와 수북한 A4 용지를 들고 회의에 참석했다. 우리가 광고할 제품은 한 제약회사의 새치염색약이었다.


N: 썸네일 한번 볼까?

나: 네 우선 콘셉트 A의 첫 번째 아이디어입니다.

      이미지로 파뿌리를 등장시킬 것이고요.

      카피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안 살래”로 했습니다.

N: 음.... 다음 거.


나: 네 다음 아이디어입니다.

      이미지로 찰랑이는 머릿결의 여자 뒷모습을 등장시킬 것이고요.

      카피는 “우리 딸인 줄 알았지?” 로 했습니다.

N: 흠.... 다음 거.


그날도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회심의 첫 번째 아이디어 이후로 나의 썸네일들은 줄줄이 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N실장의 회의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역시나 플랜 B가 많아야 했다. 나 역시 이날의 회의를 위해 열개가 넘는 플랜 B들을 회의실 벽면 가득 붙여 놓았다. 신입 시절에는 선배들이 가져오는 아이디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개수의 내 아이디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차가 쌓이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디어라고 언제나 막 담근 겉절이처럼 싱싱한 게 아니란 걸. 나는 반년쯤 전에도 냈던 다른 제품의 아이디어들에 카피만 슬쩍 바꾸어 아이디어 수 늘리기 작전을 쓰고 있었다. 짬으로 터득한 일종의 생존비법이었다.


N: 뭐 좀 신선한 거 없나?

나: 그럼 다음 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둔 30대의 남녀를 손까지만 클로즈업하고요.

    카피는 “신경 쓰인다 새치!”로 했습니다.

N: 어 그거 한 번 발전시켜 봐!

나: 야호!!!! (속으로 외쳤다.)


회심의 열 번째 플랜 B는 작년 겨울 핫초코 광고를 위해 냈지만 탈락됐던 아이디어였다. N실장은 오래전 아이디어를 기억 못 하는 것인지 나의 짜깁기가 교묘했던 것인지 어쨌든 그렇게 성과를 남기고 회의실 밖으로 탈출했다. 플랜 B로 가득한 상자 하나를 책상 아래 두고 아이디어와 씨름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플랜 B 상자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어제는 탈락의 헛헛함을 쌓는 상자였다가 내일은 생각할 시간이 부족한 나의 믿을 구석이 되기도 했다.



매일 쓰기 도전을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일이 글감을 찾는 것이다. 매일 글 쓰기 전 책상 앞에 앉아 십분 쯤 멍하니 오늘 쓸 소재를 떠올린다. 생각 나는 대로 빈 노트북 화면에 이것저것 끄적여 본다. 포기가 빠른 타입인 나는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금방 다음  생각으로 넘어간다. 그러는 중에도 떠오르지 않으면 아이폰을 꺼내 글감 리스트를 쭉 읽어본다. 설거지하다가, 밥 먹다가, 샤워하다가 반짝 떠오른 생각들을 키워드만 써놓은 형태다. 생각이 떠오른 순간의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살을 덧붙이긴 해도 누가 보면 쓸모없는 나뭇가지들 늘어놓은 형상이다. 그들 중 반 이상이 이미 글로 표현되었다. 반쯤은 이야기로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단조롭거나 재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매일 쓰는 내 글이 그리 재미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름의 기준은 정해 놓았다. 어느 날은 불쏘시개로도 못쓸 것 같은 생각의 단편이 반짝 마음을 끌어당길 때도 있다. 그날의 내 기분과 생각지도 못한 이슈로 글감에 생기가 막 불어넣어지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감이 될 가능성 10퍼센트의 생각 조각들을 그렇게 집요하게 끌어모은다. 아들의 돌멩이에서도, 나의 오래된 추억에서도.

십몇 년 전 나의 보스 N실장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목표의 끝까지 가고 싶은 내가 글을 써야 하는 나를 위해 외친다.

‘다음 거 없나?’

있습니다 있어요. 플랜 B는 언제나 두둑하다. 답도 없고, 집요함도 없으면서 포기는 빠른 내가 내일을 희망하며 배짱을 튕길 수 있는 유일한 믿을 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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