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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29. 2019

오늘의 스트레칭


매일 똑같은 움직임으로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 내 할아버지 용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선다. 걸어서 이십 분쯤 걸리는 마을 어귀까지 갔다가 갔던 길을 돌아와 웃새매(마을 위에 있는 우물을 동네 어른들은 그렇게 불렀다.) 옆에 서서 국민체조를 했다. 일제시대의 소학교에서 배운 국민체조는 내가 아는 것과 순서와 동작이 많이 달랐다. 내가 아는 국민체조가 경쾌하고 웅장한 느낌이라면 용기의 체조는 깜찍한 면이 있었다. 허리에 손을 짚고 발 뒤꿈치만 까딱까딱한다든가, 팔은 꼭 두 번씩 접고 두 박자에 펴는 동작들이 그랬다. 용기의 체조는 오 분 정도 이어졌다. 그동안 마을 여자들이 아침 해먹을 물을 길으러 다녀가기도 하고 부지런한 바둑이들이 뜀박질하며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누가 다녀가든, 날이 춥든, 해가 뜰 생각도 안 하든 용기는 순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체조를 했다. 그리고 들고 온 양은 주전자에 물을 가득 떠서 집으로 돌아왔다.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마실 물이었다. 아직 용기의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90년대 초반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용기가 떠다 준 물을 아침 지은 압력솥에 부어 숭늉을 끓이고 남은 주전자는 식구들이 오며 가며 마시도록 대청마루 한 귀퉁이에 가져다 두었다.


내 할아버지 용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천 년대 중반까지 매일 같은 아침을 맞이했으니까 이십 년 이상  아침 루틴을 이어간 샘이다. 이십 대가 되어 고향을 떠나 대학을 다니던 나는 몇 달에 한 번 용기를 만나러 다녀왔지만 만나지 않고도 그가 어떤 모습의 아침을 맞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마을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온 몸 구석구석 깨끗한 산소를 보내고, 이가 시릴 만큼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제일 먼저 마셨을 용기를 생각하면 나도 좀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살고 싶었다. 이십 대의 머리가 아프던 아침에 용기가 떠다 준 우물물을 마시면 정신이 번쩍 뜨일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나의 아침은 이불 위를 굴러다니며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아들의 부스럭 거림으로 시작한다.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에 눈을 뜨면 일곱 시이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곧장 가서 세 식구 먹을 누룽지를 꺼내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고소하게 퍼지는 누룽지 냄새를 맡으며 거실 가운데 앉아 스트레칭을 한다. 목을 돌리고, 허리를 접었다 펴고, 손목, 발목까지 관절을 풀어준다. 밤 새 누워 자느라 뻗뻗해진 근육까지 쭉쭉 늘려주며 고소한 누룽지 냄새를 세포 하나하나에 채운다. 스트레칭을 하며 개운해진 몸으로는 엄마가 세 명쯤은 필요한 가족의 아침 준비도 혼자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 속 준비물을 챙기고, 일어나는 순서대로 두 조각씩 먹을 사과를 깎고,  따뜻한 반찬 하나 만들고도 아이를 안아줄 수 있고, 남편에게 어젯밤 못다 한 잔소리며 새로운 뉴스에 대한 수다를 떨 수 있다. 모두가 누룽지 냄새와 스트레칭 덕이다. 마흔 살이 된  어느 날 아침에는 그 옛날 팔십 대이던 용기처럼  몸을 움직여 하루를 깨우고 우리 식구 하루를 챙기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잘 살아가고 있다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오늘의 글을 깨우려고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니 어린 날 용기의 아침이 떠오른다. 내 할아버지 용기처럼 매일 작지만 반짝이는 행복으로 충만한 나의 아침이 떠오른다. 세포 하나하나에 커피 향을 채워 넣고 좋아하는 작가처럼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속 열정의 기지개를 켜본다. 쭉쭉 늘어나 말랑말랑해진 기분으로 성실한 글 한편을 쓴다. 평생 변함없는 루틴이어도 전혀 지겹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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