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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28. 2019

첫눈 오면 손잡고 나가자

아들과 손잡고 걷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돌 무렵에는 아장아장 걸어서 낙엽을 밟고, 좀 크면 팔짱 끼고 뛰어가 함께 떡볶이를 사 먹는 엄마와 아들은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자의 외출이었다. 생각만 해도 다정하고 흐뭇한 풍경이다. 내 아들이 엄마 품보다 친구나 애인과의 외출을 즐기기 전에 실컷 산책해야지 생각하곤 했다.


율이와 처음 단 둘이 외출한 날을 기억한다.  태어난 지 백일이 갓 지난 율이를 안고 안과에 가야 했다. 부산이지만 1월의 바람은 매서웠기에 만만의 준비가 필요했다. 십오 분만 걸어가면 병원이 있지만 집을 나서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이상 걸릴 외출에는 필요한 짐들이 많았다. 우선 아이가 마실 따뜻한 물과 한 번 먹을 분유를 챙겼다. 기저귀 몇 장, 손수건, 물티슈까지 넣으니 작은 손가방 하나가 가득해졌다. 손발까지 따뜻하게 감싸는 우주복을 입히고 아기띠에 앉혔다. 그러고도 발이 시릴까 봐 패딩 커버를 씌우니 아이 얼굴에 차가운 겨울바람은 스며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위에 두둑한 나의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이미 집을 나서는 데 진이 빠졌다.


하지만 고생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진료를 위해 우선 나의 코트를 벗고, 패딩 커버의 버클을 풀고, 아기띠 버클을 풀고 아이를 내려 우주복을 벗겼다. 대기실 의자 한쪽에 우리가 쌓아둔 옷가지만도 산이 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버클의 순서가 틀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좀 전의 과정을 거스르며 아이를 앉았다. 물도, 분유도, 기저귀도 꺼내지 않은 묵직한 가방을 다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터운 겨울 외투 속에서 아이까지 안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는 내 모습은 흡사 펭귄과 같았다.


아이가 좀 자랐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친정 아빠 생신이라 차로 두 시간 거리의 고향집에 내려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내려갔다가 저녁밥 먹고 올라올 요량으로 짐을 챙겼다. 우선 우리 세 식구 입고 갈 옷, 율이의 편한 내의 두 벌(더러워지거나 젖을 것을 대비해서), 외출복 두 벌, 기저귀 하루치, 물티슈(짐 가방에 넣을 큰 거 하나, 손가방에 넣을 작은 것 하나), 손수건에 여벌 양말, 낮잠을 대비한 이불이 우선 준비되었다. 다음은 식사 준비 코너이다. 숟가락, 포크에 전용 물병, 주스와 갖가지 간식이 차례대로 가방에 담겼다. 이 외에도 갑자기 아플 것을 대비한 해열제, 콧물이 나올 것을 대비한 코 뻥 도구, 넘어질 것을 대비한 반창고와 연고를 넣고 마지막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몇 개를 챙겼다. 짐을 얼추 챙기고 나니 남편이 잠 깨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허~~ 억! 우리 오늘 이민 가는 날이야?”

“아니, 오늘 저녁에 돌아올 거라서 간단히 챙겼어.”

“이거 큰 캐리어 하나 꺼내서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뭘 캐리어씩이나, 내 백팩에 다 넣고 갈 거야.”

“백팩으로는 어림도 없다에 한 표 건다.”


당연히 어림도 없는 백팩은 옷장에 그대로 걸린 채 24인치 캐리어를 끌고 당일 외출을 다녀왔다. 이날 하루가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동안 매번의 외출이 이런 식이었다. 나의 외출 준비에는 바뀔 날씨 걱정, 아이의 먹을 걱정, 다칠 걱정, 재울 걱정 온갖 걱정들이 가방을 채웠다. 그 걱정들을 대비하느라 비닐 지퍼팩에 온갖 준비물 들을 넣어 꼭꼭 잠갔다. 바라고 바라던 단출한 외출은 애가 있는 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 근처 공원에 가도 남편과 아이가 손 잡고 걷는 동안 나는 짐 가방 하나를 매고 끙끙대며 뒤 따르는 날이 많다.


"엄마, 같이~~~"

"어, 율아 미안해~ 엄마 가방이 무거워서 손 잡기 힘들어."

"싫어~~ 엄마, 같이~~"

"그래 그래 손 잡고 같이 가자. 헉헉"


꿈과 현실의 차이란 이런 건가. 현실 육아란 이렇게나 전투적이어야 하는가를 매번 겪고서야  TMW (Too Much Worry)를 끌어안고 사는 나를 발견한다. 외출할 때마다 아이 손을 신나게 흔들어주지 못한 채 몇 번의 계절이 흘렀다.  훗날 아이의 기억 속에 어디 나갈 때마다 이고 지고 끌어안고 다니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를 걸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친정 엄마의 빽빽한 냉동실에서 유물을 발견하겠다며 잔소리를 퍼붇던 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작 냉동실을 비울 줄만 알았지 내 걱정은 또 다른 모습으로 힘을 빼고, 온갖 비닐 쓰레기를 만들고,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 쓰였다.


오늘 아침은 바람이 매섭다. 강원도에는 벌써 눈이 쌓였다던데 부산에도 눈이 내릴까? 올해 첫눈이 오면 창밖을 보며 '눈 내린다~~ 밖에 나가자~~' 호들갑을 한 번 떨어야지. 그리고 그 기운에 후다닥 점퍼만 입고 아이 손 잡고 밖으로 뛰어나가야지. 눈 내리는 공원에서 신나게 뛰며 옷을 더럽혀야지. 준비한  손수건이 없어도, 엎어지면 붙일 밴드가 없어도 걱정 말아야지. 다시 아들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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