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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Dec 09. 2019

내가 살던 집

내 기억 속 가장 처음 우리 집은 검은 기와지붕 집이었다. 생선 비늘처럼 켜켜이 기와를 얹은 안채는 네 칸이었는데 부엌, 안방, 문을 열면 마루가 되고 닫으면 방이 되는 안청, 작은 방이 있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안채에 살았다.


아랫채에는 방 두 개가 있었다. 식구가 열 명도 넘던 시절에는 나의 삼촌과 바다일을 돕던 삼촌들이 아랫채에 살았다. 식구들이 객지로 나갔다 돌아오면 각자의 방도 바뀌었다. 어느 때엔 중학교 다니던 고모가 아랫방을 쓰고, 어느 때에는 아랫채는 비운채 곡식을 쌓아두기도 했다.


군대 간 삼촌의 방은 오래 비어 있었어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린 나는 비어있는 삼촌의 방에서 언제 읽다 꽂아둔 지 모르는 무협만화를 꺼내 읽기도 하고, 쌓인 잡지를 찢어 딱지를 접기도 했다.


안채와 아랫채 사이 큰 마당이 있던 집. 마당 가에 사계절 꽃이 쉼 없이 피던 할머니의 화단이 있던 집.


고모들이 자라서 시집을 가고, 삼촌도 타지로 떠나고 우리 식구도 분가하고 난 이후에는 그 큰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오래 사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할머니와 고향으로 돌아온 삼촌이 오래 함께 살았다.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 살아도 고래 등 같던 집이 두 식구만 살 때는 그렇게 작아 보였다.


검은 기와집의 식구들이 바뀌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집은 그대로 거기 있는데 어느 해에는 빈 방이 하나도 없다가 어느 해에는 네 개도 넘었다. 가족이 시간을 보낸다는 건 방을 채우고 비우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함께 겪는 일인 것만 같았다.


이제 우리 가족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라는 소식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었던 그 집이 문득 그리웠던 건 유자나무 때문이었다.


유자나무는 검은 기와집과 역사를 같이 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밭농사는 미래가 안 보인다며 집 뒤 큰 밭 한편에 심어 놓은 것이었다.


이맘때 늦가을에는 할머니와 큰 밭에 자주 갔다. 해풍 맞고 자라 땅에 착 붙은 시금치도 캐고, 겨울 마늘도 캐서 장에 내다 파는 할머니를 도왔다.


 할머니가 밭일하시는 동안 밭두렁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으면 주먹 만하게 주렁주렁 열린 유자나무가 보였다. 까치가 날다가 툭 치기라도 하면 금방 유자가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해가 짧은 겨울에도 종일 그늘이 지지 않던 유자나무는 황금 덩어리를 달고 있는 것처럼 번쩍번쩍 빛이 났다. 햇볕을 얼마나 쬐였는지 유자차에 햇살 맛이 났다. 달고 새콤했다.


팔려고 심어 놓았지만 그 누구도 유자를 따다 팔지 않았다. 그 덕에  명절도 아닌데 할머니 집에는 온 식구가 모였다. 타지로 시집간 고모들도 유자 따러 오고, 분가한 우리 가족이며, 일 년을 가야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서울 할머니도 유자 따러 왔다.


큰 집의 방이 하나씩 비던 시절과 반대로 날이 추워도 온 식구가 검은 기와집으로 모였다. 두 식구뿐이던 집이 시끌벅적해지는 계절이었다. 주말마다 딸네 아들네가 다녀가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것만으로도 좋아하셨다. 지나고 보니 유자나무는 할아버지의 혜안이었나 싶다.


고래 등 같은 검은 기와집은 아직 그 자리에 있을까. 유자나무는 올해 추위에도 황금같이 번쩍이고 있을까. 문득 그리운 건 또 이렇게 한 해가 가려해서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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