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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Dec 16. 2019

오르막길을 오르는 작가 지망생의 고백

어릴 적부터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소설가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초등학교 시절 받은 칭찬과 상장은 대부분 글을 쓴 후에 따라오는 것들이었다. 내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착각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은 당연하게 문창과와 국문과만 지원했다.


'국문과는 굶는 과다'라며 말리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달리 다른 길을 몰랐다.

글에 빠져 공부는 소홀했는데 다행히 지방 도시의 한 대학 국문과에 합격했다.  매년 신춘문예와 공모전에 지원했다. 단 한 번도 합격하지 못했다.  4년 동안 단 한 번의 칭찬과 상장도 받지 못하자 겁이 났다. 드디어 내가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소설가가 못되면 뭘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탄탄대로를 달릴 것만 같던 내 꿈의 행진은 끝이 나고 말았다. 졸업반이던 나는 혼란의 시기를 보낸다. 나중에 뭐가 되든 졸업은 해야 했기에 논문 준비를 하러 매일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가서도 하라는 자료는 안 찾고 읽고 싶은 책만 읽었다. 하루에 두세 권씩 문학, 예술, 인문 서가를 오가며 식욕 폭군처럼 책을 먹어재꼈다.


그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책을 찾고 있었다. 광고에 관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히트를 쳤던 광고와 그 카피가 탄생한 스토리를 소개한 책이었다. 글 솜씨가 썩 뛰어나진 않아도 이 정도면 광고 카피 몇 줄쯤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광고 카피는 상업적인 글쓰기의 꽃 아닌가.

국문과 졸업하고 광고회사 카피라이터가 되면 적어도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세 번째 광고회사 보스인 N실장님은 어느 날 내가 쓴 카피를 검토하다 말고 말했다.


"너는 참 평범한 카피라이터야."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욕에 가까운 칭찬 같아 되물었다.


"평범한 게 나쁜 거예요?"

"광고 회사에선 나쁠 수도 있지."

"왜요?"

"여기선 헷가닥한 애들이 카피를 잘 쓰거든."

"그래도 저 열심히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또 용하다는 거야."

"이건 좋은 거 맞죠?"

"좋은 거지. 잘하고 있어"


아무리 곱씹어도 욕인 것만 같은 칭찬을 뒤로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신문 스크랩을 하며 결심했다.


'앞으로 신문 광고는 모조리 씹어 먹고 이것보다 좋은 카피를 써야겠어!'


그로부터 몇 년 더 광고 카피를 쓰는 동안 정말 모든 광고의 카피를 집어삼켰다. 어느 날은 내가 만든 광고가 스크랩하던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N 실장님이 내게 했던 말이 욕보다는 칭찬에 가까웠다는 사실은 광고회사에 사표를 내는 날 알게 되었다.


"요즘 야구하는 애들 중에 누가 타율이 제일 좋냐?"

"아마. 이대호요?"

"몇 할쯤 되냐?"

"3할은 넘겠죠."

"광고하면서 3할 치면 완전 메이저거든. 헷가닥 한 애들은 카피 열 개 쓰면 한 개는 장외홈런, 다섯 개 정도는 무난해. 그리고 네 개는 한심하고. 그러니 3할 치기 쉬운 거 아니다. 너는 3할 칠 수 있는 카피야. 평범한데 3할 치는 카피는 탁월하다. 그러니 광고 계속해라."


책상을 대충 정리한 상자 하나를 안고 나오며 눈물이 났다. 광고 전공도 아니고, 공모전 한번 수상해 본 적 없는 지방대 출신이 어쩌자고 서울까지 와서 콩쥐와 같은 마음으로 다닌 회사였다. 헷가닥 하지도 않고 너무 평범해서 없어 보일까 봐 몇 년 동안 매일 아침 신문 스크랩을 하고 남의 광고 카피들을 씹어 먹으며 숨 죽이고 일했다.



소설가는 아니라도 다시 작가가 되고 싶은 오늘의 나는 그때 콩쥐 시절처럼 가난하다. 쓸 거리가 없고, 도무지 하얀 화면을 채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여전히 그럴듯한 타이틀 같은 것도 없다. 칭찬해주는 이가 없지만 그래서 다행히 무시도 받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칭찬의 시대와 칭찬 궁핍의 시대를 모두 겪고 보니 누군가를 키우는 게 꼭 칭찬만은 아닌 것도 같다. 오랜만에 칭찬도 좀 받고 싶어서 공모전을 기웃거리다 보니 칭찬 없이도 꾸역꾸역 오르막길을 올랐던 카피라이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매일의 성실한 노력으로 누구도 모르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벽을 이렇게 또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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