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15

단편소설

by 수요일

단편소설_꽃비 15

다음 날 아침,
다행히 꽃비는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여자의 아침 얼굴은 전날 밤을 반성하라던가? 꽃비의 얼굴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붓고 일어나고 까칠하고.

아이고 이거 죽었네. 근영이 말이 맞았구나

마시라며 새벽까지 물고 늘어지던 퍼스트가 떠올랐다. 호탕한 척 웃던 그 웃음이 왠지 비열하게 느껴진다. 메이크업 언니가 난리 칠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샤워하고 대충 비비크림만 바르고 모자 쿡 눌러쓰고 방을 나왔다. 문은 이제 밀기만 하면 잠기니까 딴 때 같으면 엉덩이든 등이든 밀어서 닫고 나갔을 텐데 오늘 따라 안 하던 짓을 했다. 문고리를 잡아 미는데 손바닥을 뭐가 찔렀다. 보니 열쇠가 꽂혀있었다.

철렁

꽃비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봉인... 그 봉인을 지켜주던 기억 하나가 이 아침에 무너졌다... 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꽃비는 열쇠를 뽑아 가방에 넣고 세트장으로 떠났다. 현수의 기억은 이제 삭제된 다른 기억처럼 흐려지고 가벼워져 있을 거라고 꽃비는 여겼다.

서울에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촬영장이다. 경기도 어느 곳. 이 일을 하기 전엔 와볼 거란 생각도 못한 먼지 가득한 길을 한참 걸어들어간다. 감독과 스탭들이 벌써 나와서 세트며 조명을 챙기고 있었다.

아 꽃비 씨! 어서 와.

감독이 몇 번 같이 촬영을 진행했던 사람이라 조금은 편안한게 다행이었다. 꽃비가 도착하자 바빠진 팀이 있었다. 메이크업 코디 헤어.

얼굴이 왜 이래? 프로답지 않게. 아 정말 어쩌냐. 이 사태를.

제일 먼저 푸념을 내뱉은 쪽은 역시나 메이크업이었다.

언니, 어째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하여간 가려보지 뭐. 어휴 피부 상한 거 좀 봐. 어제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피부에 다 나오잖아.

히히

꽃비가 그냥 웃자 메이크업이 이마에 군밤을 주는 시늉을 하고 부지런히 얼굴 세팅에 들어갔다.

자 준비됐어요?

여기저기서 네 좋습니다 소리가 들렸다. 모델 부르는 소리가 나고 꽃비가 조명 한 가운데 섰다. 노출을 체크해서 조명 세팅을 마친 후 슛에 들어갔다. 첫 컷부터 반복촬영이 계속 됐다.

욱욱 울컥

꽃비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버텼지만 결국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조명 아래라 속이 더 뒤집어지고 말았다. 꿀꺽 꿀꺽 올라오는 걸 삼켰지만 결국은 세트장 뒤 한적한 곳에서 토하고 말았다.

우에에엑 콜록 콜록

아으 목 아파 속 아파를 연발하며 꽃비가 토를 했다.

토닥토닥토닥

누군가가 토하는 꽃비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자 속이 조금 더 편안해지며 남은 토를 다 쏟아냈다.

아 고맙습니다.

불쑥 내미는 티슈로 입가를 정리하고 다른 손으로 주는 종이컵에 담긴 물로 입을 헹궜다. 대충 마무리를 끝낸 꽃비가 고맙다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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