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16

단편소설

by 수요일

단편소설_꽃비 16

가장 어려운 순간에 만난 이별이라 어쩌면 다행이다. 떠나보내기 위해 나머지 모든 핑계를 덧씌울 수 있으니까,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에게도 꽃은 꽃일거야. 그립지 않아본 사람에게도 그리움은 그리움이듯.

꽃 지고 내린 비.

야 뻔뻔아!

꽃비가 자기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토하느라 힘을 많이 써서 커봐야 작았지만 앞에 있는 여린 꽃사슴이 놀라기엔 충분했다.

소리 지르지 마.

어휴 어떻게 내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지? 꽃비가 황당하다 못해서 기가 막히니 말이 안 나왔다.

너 너 너

입원했었어.

어? 입원?

응,

어 어디가 아픈데?

여기저기. 보여줘?

어!

꽃사슴이 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꿰맨 자국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팔뚝.

이거 뭐야? 왜? 너 자살도 하니?

꽃사슴이 팔을 내리고 말했다.

자살을 왜 해? 다쳤어.

뭘 하다가 다쳤냐고?

그날 옷도 사고 너 스테이크 만들어주려고 고기도 사고 소스 만들거랑 과일이랑 이것저것 사서 너네 집으로 다시 가다가,

나 스 스테이크 만들어준다고? 네가? 그 난장판을 해놓고?

꽃비의 질문이 두서없이 터졌지만 꽃사슴은 지가 대답하고 싶은 것만 대답했다.

어. 난장판이야 치우면 되니까.

치워?

그래. 너 퇴근하기 전에 치우면 감쪽 같잖아.

감쪽? 너 감쪽 먹어봤어? 이 감쪽 먹다가 십년 동안 체할 나쁜 놈아.

하여튼, 동네에 시장 있더라. 거기 가니 청바지도 만 원이면 사고 티셔츠도 삼천원이면 사고,

지금 너 입은 옷이 그 시장 표야?

아냐, 이건 다른 옷이야. 그때 옷은 또 피가 많이 젖어서 버렸어.

피? 아 대체 뭔 사고를 당한 거야?

다시 가다가, 근데 너 촬영 안 해?

으악! 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또 그렇게 가면 입원이고 뭐고 그냥 죽었어.

촬영장으로 달려가면서 꽃비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왜 나는 화를 안 낸 거지?
아냐 화를 못 냈지. 틈이 없었잖아.
왜 틈이 없었지?
그야 저 뻔뻔이가 입원했다고 해서.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글쎄? 정말 무슨 상관이야?

자문자답하지만 꽃비의 솔직한 마음은 꽃사슴이 다시 나타난 게 반가운 것도 같았,을리가 없잖아. 난생 처음 같은 밤 보낸 남자놈이 개판을 치고 사라졌는데!

나 나쁜남자에게 끌리는 스타일이었나

초라하게 은팔찌 차고 나타난 게 아니라 전처럼 변함 없이. 미안해서 뒷걸음 친 게 아니라 전처럼 뻔뻔하게. 그런 사실이 뭐 현수다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으아아으아으 이게 무슨 조화야 대체.

촬영장에 들어가니 모두들 꽃비를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슛 들어간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토한 덕분인지 몸은 좀 힘들었지만 속은 더이상 울렁거리지 않았다. 촬영은 새벽 두 시가 지나서 끝났다.

아오~ 매번 이래 매번!

경기도에 있는 세트장에서 이 시간에 끝나면 꽃비는 집에 갈 방법이 없었다. 처음엔 그걸 모르고 신경 안 썼다가 집에 가느라고 아주 곤욕을 치렀었다. 매니저가 따로 없다보니 그런 거 하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조명차 컨테이너 박스에서 어둠 속에 흔들리며 실신할 지경으로 실려가거나 일이 있어 늦게 출발했던 밥차 주방칸에서 덜그럭거리는 국자 소리와 함께 서울로 간 적도 있었다.

아이고

투덜거리던 꽃비는 누구 차를 얻어타야 서울까지 잘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하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어 정신 없이 촬영을 마치니 꽃사슴과 만났던 이야기를 까맣게 잊었다.

메이크업 언니에게 말하는 게 낫겠지?

코디는 옷이 잔뜩이라 자리가 안 될 거였다. 한 번은 도저히 차를 못 구해서 코디 차를 얻어타고 갔는데 옷이 잔뜩 걸린 옷걸이 사이사이에 포개져서 코를 간지르는 실밥들과 재채기를 하며 서울까지 달려야 했다. 꽃비가 자동차에 시동 거는 스탭 중 여자들 차를 유심히 보며 눈치를 잡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앞에 섰다.

어? 뭐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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