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 브레이커

악마는 숨지 않는다.

by 수요일


단편소설 갤럭시 브레이커


23


- 일종의… 상실감 같은 거예요.

- 상실… 뭘 잃어버렸죠?

- 텅 빈 마음? 텅 빈 정신? 그래요. 정신. 우리는 정신을 잃은 누군가의 몸에 숨어든 악마입니다.


파란 눈의 남자가 유리 벽 너머 끝없이 놓인 캡슐을 바라보며 잔을 들어 바라보았다. 옅은 아이보리 빛깔이 감도는 투명한 액체가 잔의 유리 벽에 흐릿한 레이어를 만들며 흘러내렸다.


- 그거 알아요? 악마는 숨지 않아요.

- 왜죠?

- 숨을 필요가 없거든요. 악마는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우리와 같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춥니다.


잔을 들어 빙빙 돌리던 남자가 한 모금 마셨다.


- 이 와인은 옛 지구의 소비뇽 블랑 품종으로 만들어진 무통 카데를 재현한 것인데 드라이하면서 산미에 바디감이 아주 일품이에요.


앞에 앉은 여자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 옛 지구의 모든 것들은 참 아름답군요.

- 우리는 왜 옛 지구의 모습을 이곳에 심으려고 애를 쓸까요. 이제는 찾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다른 우주의 그림자 안에 기록으로만 녹아 사라진 기억일 뿐인.

- 정신 아닐까요? 잃어버린 몸을 찾아 떠도는 유령 같은.


남자가 패널에서 동면 캡슐 설정을 찾아 메뉴를 열었다. 그리고 오픈을 눌러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의 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 모습을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경건하게 자세를 잡아 앉고는 유리 벽 너머 하나의 캡슐이 늘어선 열에서 나와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하지 말아요.


담담한 목소리로 여자가 남자를 제지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캡슐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캡슐 룸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돔이었다. 수많은 동면 캡슐들이 방사상의 배치로 빽빽하게 자리 잡고 각각의 어드레스를 차지했다. 그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었다.


-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들딸이에요.


묵묵히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캡슐을 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그저 듣기만 할 뿐 여자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고 캡슐의 이동을 바라보았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어. 소거 프로세스를 진행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적막한 컨트롤 데크에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렸다.


- 승인한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어의 소거를 진행합니다.


캡슐에 이어진 튜브가 하나씩 분리되고 캡슐 바닥의 공간이 열리며 안에 채워졌던 노란 액체가 분출되었다. 텅 빈 캡슐에서 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숨을 쉬던 인간의 육신에서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데크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열리고 정신이 사라진 육체가 바닥 깊은 공간으로 떨어졌다.


-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그 순간 먼 우주의 어느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갤럭시 브레이커 함선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빛으로 변하며 소리 없이 새카만 공간을 하얗게 밝힌 우주 함선은 어둠 사이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텅 빈 캡슐이 제 위치로 돌아갔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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