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21.주린
안 돼!
스크린을 들여다보던 주린이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했다. 기주는 모선이 있는 쪽을 흘깃 올려다보고 착륙선의 벽에 부착된 비상용 도끼를 꺼내어 입고 있는 우주복의 한곳을 내리쳤다.
기주!
아무리 튼튼하게 제조된 우주복이라도 같은 부위에 타격이 계속된다면 결국 손상되고 말 것이다. 우주복이 손상되면 기주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고 임무도 끝이었다.
기주.
주린이 한숨처럼 낮게 기주를 부르고 기주에게 연결된 케이블의 모터를 작동시키며 우주복 내부에 가스를 주입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기주의 고개가 푹 꺼지고 조금씩 착륙선으로 끌려들어 갔다. 주린에게는 기주가 끌려가며 땅에 팬 자국이 가슴에 파고든 상처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얼마 후, 캐리어 로봇이 보급물자를 모두 싣자 착륙선이 보급기지를 떠나 모선으로 돌아왔다. 기주의 우주복과 튜브가 제거되고 침대로 옮겨졌다. 주린은 기주가 깨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깨어나면 그 후엔 또 어떤 모습을 보일까. 오랜 시간을 보내며 업데이트를 거듭한 주린은 기주의 예민한 신경성 발작에 점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에 띄는 날카로운 물건들을 모두 치웠다. 주린은 긴 시간을 함께하며 한층 가까워진 한 남자의 깨우기 두려운 깊은 잠을 지켜보았다.
주린은 타의에 의해 휴머노이드가 되었다. 기주는 정신과 육신이 보존되어 별 지우개 함선 콘트롤 데크에 있지만, 주린의 몸은 신연방 어느 커뮤니티의 수면체이고 영혼이 시스템으로 인스톨 되었다는 것. 이제 싱크로율 69%의 휴머노이드로 업그레이드가 진행된 상태였다. 일 년 늦게 인스톨 되어 업그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존재, 서브 시스템인 이룬과의 힘겨루기도 쉽지 않았다. 이룬은 기주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서브 체계로 시스템에 인스톨되었다. 원래는 이룬이 인스톨 되고 주린은 다른 함선이나 보급기지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가 되었으리라. 이룬 대신 기주의 함선에 배정된 주린은 그래서 이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주와 더 많은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룬과 기주는 사랑으로 묶여있어서인지 이룬의 업그레이드는 놀랍게 빠른 속도를 보였다. 이룬은 싱크로율 67%까지 진행된 상태. 주린보다 일 년 늦게 시스템에 인스톨 된 것을 생각해볼 때 예측을 뛰어넘은 업그레이드였다. 이대로 놔두면 이룬에게 시스템 콘트롤의 권한이 넘어갈 것이다. 즉 메인시스템의 지위가 바뀌는 것이다.
기주가 왜 저러고 있죠?
이룬? 랙에서 나왔군요? 기주는 지금 안정이 필요해요.
주린은 왜 나를 걸핏하면 랙에 가두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군요.
이룬을 가두는 게 아니라 업그레이드를 위한 배려였어요. 그런데 그 이후 업그레이드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군요.
이봐요. 주린. 당신 정말… 아니 아니에요. 어서 기주를 깨워요. 강제 수면 모드가 정신적으로 어떤 데미지를 주는지 알면서… 주린!
아… 이룬. 지금으로선,
주린. 기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말을 해봐요.
이룬… 난, 나는… 이룬…
“이룬… 이룬”
기주가 이룬을 부르는 잠꼬대를 했다. 이룬이 주린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주린에겐 이룬이 마치 거보란 듯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이룬보다 기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주린은 서글펐다. 이룬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 많은 시간 주린은 기주를 보살펴 왔다. 아쉽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로 표현될 수 있었다면 시스템은 심각한 에러가 나고 함선은 자멸할 정도였을 것이다.
주린.
기주를 보며 회한에 빠진 주린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네… 이룬.
주린. 이러지 말아요. 주린은 제삼자라 냉정하겠지만 난 그렇지 못해요.
제삼자… 라고요?
그래요. 기주는 주린이 다루어야 할 조종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룬 난,
주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단 1초도 기주를 단지 다루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주린.
말해요. 이룬.
주린이 기주를 앞세워 소멸시킨 생명체가 얼마라고 했죠?
이룬이 그걸 어떻게? 그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룬도 알잖아요.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된 계획에서 휴머노이드의 프로세스는 뻔한…
주린. 나라면 물었을 거예요. 나라면…
이룬. 묻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주린. 물어서 기주와 의견을 나눴을 거예요.
이룬. 의견을 나눈다고 해도,
주린. 기주가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니에요. 이룬. 거부한다고 될 일이면 진작…
주린. 변명하지 말아요. 주린이 기주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사랑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거예요. 세상에 억지로 되는 거란 없어요. 주린.
이룬, 나는
주린.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스스로 갖추는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이룬…
이해해요. 주린 마음.
어? 이룬 어느새…
서브 시스템 최종 업그레이드 완료.
효율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메인시스템을 교체하겠습니까?
히든 시스템으로부터 최종 휴머노이드 비율 70%를 알리는 시그널이 소리 없이 반짝이며 기주에게 메인시스템 교체의 승인을 요청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건 요청이 아니라 통보였다. 주린이 뭐라고 했지만, 그 지시는 승인되지 않았다. 주린의 탄식이 주위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 순간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탄식 같은 부팅 소리와 함께 주린이 이룬의 시스템으로 편입되었다. 주도권이 이룬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메인시스템이 된 이룬이 지난 영상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동안 주린은 멍하게 기주를 바라보았다. 기주는 주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마치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자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기록을 체크하던 이룬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췄다.
주린. 이게 뭐예요?
묵묵하던 주린의 입이 열렸다.
내 아버지는,
주린. 다음 좌표가 없어요. 다음 행선지가 없는 거 미리 알았어요?
표현하지 않는 뜨거움. 드러내지 않는 슬픔. 꿈 없는 미래, 사랑 아닌 가족… 희망 앞의 좌절. 최선과 최악, 내 아버지는.
주린! 정신 차려요!
주린이 대답 없이 혼잣말을 계속하자 이룬이 매뉴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눈 깜박할 사이 매뉴얼을 읽어 들인 이룬이 비명 같은 소리로 주린을 불렀다.
주린!
주린은 여전히 혼잣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기로 했어. 약속했어요.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을까. 확인해야 해. 주린이 인접한 통신망을 찾습니다.
180, 179, 178, 177…,
그 사이 함선에서는 위기 시 울리는 경고와 초읽기가 시작되고 함선의 마지막이 시시각각 다가서고 있었다. 메인 컴퓨터가 콘트롤할 수 없는 히든 시스템에 프로그래밍 된 그대로, 함선은 콘트롤 데크에서 먼 곳부터 차례로 폐쇄되기 시작했다. 녹음된 음성이 숫자를 거꾸로 세며 위험을 경고했다. 파멸이었다. 이룬이 아무리 메인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고 해도 히든 시스템에 프로그래밍 된 명령은 콘트롤이 불가능했다.
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