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종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IGE Jul 12. 2017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한국소설

나는 나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최대한 열심히 하며 살았던 것 같아. 스물 일곱까지 쉬지 않았어. 평일이든 주말이든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고, 짧은 휴가에는 떠밀려가듯 여권에 도장이라도 받아야 점심시간에 이야기할 주제거리가 조금 생겼지. 


첫 회사는 밤새 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 그런데도 인턴이라는 이유로 80만원을 받아가며 일했어. 대표는 인턴제도가 너무 좋다고 했어.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지. 두 번째 회사는 정치를 하지 않았던 팀장님이 그만두면서 젊은 패기로 우리 팀 전체가 빠져 나왔지. 물론, 온전히 팀장님 때문은 아니지만. 그리고 나서 대기업에 갔더니 이제는 계약직을 비롯해서 정규직, 비정규직 선을 가르데. 횟수로 3년 정도 다녔는데 시간만 지나지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뭔가 소름 끼치더라고.



아니, 실은 지겨웠어. 14시간씩 일하다가 집에 가면 10시가 넘는데 밥만 먹고 잠을 자고 출근 했지. 어느 날 출근 길에는 지하철에서 졸다가 다음 정거장까지 가서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5분 늦게 출근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구는데 화가 치밀더라. 차라리 교통사고 나서 한 달만 쉬고 싶다는 끔찍한 말을 하기도 했지.


그런 날들이 모이다 보니 못 살겠더라고. 그래서 꿈꾸듯 캐나다를 선택했어. 자연친화적이고 뭔가 저녁이 있는 삶이 그려질 것 같잖아. 그래서 첫차를 타고 회사 근처 PC방에 앉았어. 무척 떨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떨어가며 신청했고, 3분이면 마감된다는 그 곳에 내가 붙은 거지.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 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지명이가 그렇게 자기 진로를 선택한 거지. 그런데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어. (_151)



입국심사부터 난관이었어. 6개월 이상 영어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었는데 그조차 알아듣지 못했지. 두어 달은 공부를 하겠다고 하나도 늘지 않는 어학원을 다니며 놀다가 돈이 다 떨어지는 것 같아서 스시 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조기 취업을 한 터라 아르바이트라고는 전무한 나는 결국 트레이닝 2주 하다가 잘렸지. 그때 처음으로 버킷리스트라는 것을 만들었어. 1번은 스시 가게에서 90일동안 일하기. 결국 해냈지만.


내가 살던 집은 계나가 말한 닭장 셰어와 비슷해. 나는 커튼을 친 거실에서 살았고 그와 나는 헬퍼였어. 집 오너가 따로 있고 우리는 마스터나 세컨룸 사람 관리를 하고 전체적으로 집 관리를 하는 거지 오너는 월세만 받으러 와. 헬퍼로 지내면 집세가 좀 저렴하거든. 계나가 살았던 것처럼, 나 역시 누가 음식을 하면 냄새가 다 들어오고 건조기를 돌리면 습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거나 눈이 따가워. 돈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던 시간이었지 8개월 동안 그렇게 살았어. 





국외자라는 게 참 서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이곳에서는 평생 국외자겠구나. 그런 체념도 했지.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했어. (_170)


13시간씩 일하던 그가 튀김을 하다가 화상을 입어서 부랴부랴 보험사에 전화해서 병원에 갔어. 그나마 내가 조금 더 영어를 할 수 있었는데 너무 놀라고 준비 없이 가니까 말이 하나도 안 나오더라고. 그때 데스크에 있던 직원의 표정이란, 정말 서럽더라. 


화상을 입어서 2주동안 일을 못했는데 복지는 좋았어. 안 되는 전화 영어로 서류를 넣고 쉬면서 체크(급여)를 받았지. 복지는 끝내준다 라고 말하면서도 전화 영어는 진짜 어려워 라고 말하는 상황이 되었어. 체크를 받는 동안은 여러모로 전화할 일이 많았거든. 이때 전에 없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_180)


캐나다에서도 특출 나게 행복감을 느끼며 산 것은 아니야. 한국에서 소소하게 느낄 행복감들을 비슷하게 느끼면서 떠나온 것에 대해 합리화하며 하루를 보내는 정도였지. 그런데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매일 같았어. 과연 나아질까 싶을 만큼 말이지. 다만, 캐나다에 살면 60대 이후와 의료 복지가 되니 악착 같이 오늘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나의 발목을 잡더라고. 


그런데 결심을 하고 한국에 와서 지내니까 결국 한국이랑 캐나다랑 다를 바가 없어. 가까이에 바다가 없는 것 말고는 그래서 나중에 제주도에 갈까 생각중이야. 어쨌거나, 그나마 다행인건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게 됐고 그것 이루려 노력하며 살고 있어. 형태는 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시작부터가 다른게 느껴져. 여전히 사자와 싸울 힘은 없지만, 톰슨가젤끼리 연대해서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거야. 원래 우리끼리도 지지고 볶고 잘 살아왔으니까 말이지. 이게 나와 계나의 차이가 아닐까.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기 위해 호주 이민을 단행했다고 말한다. 솔직하고 구체적인 속내는 이렇다. “내가 호주에 간 것은 내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한 일이야.” 지명의 가족에게서 신분 차이의 굴욕을 절감했으므로, 계나는 신분 상승이야말로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 신봉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 감각에 침윤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그녀는 틀림없이 불행해진다. (_201)

매거진의 이전글 홍성태 [나음보다 다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