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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Mar 09. 2018

김애란 [비행운]

한국소설

화장실에 앉아 급하게 볼일을 해결하고 일어설 때는 「하루의 축」에서 만난 기옥씨가 생각이 난다. ‘기옥 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탈취제를 뿌리고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꽃처럼 활짝 벌어진 따끈한 생리대를 보며 역시 화장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더럽게 쓴다는 걸 확인했다. ‘더군다나 휴지도 많이 쓰고 말이지’(_185)’ 괜히 등을 돌려 내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다시 한번 검토한다.


내 구매욕에 앞서 망설이는 순간에는 불현듯 「큐티클」이 떠오른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 (_214)’ 


내게 《비행운》은 맞지 않은 브래지어를 한 날처럼 잊을 만 하면 나타나 불편하게 했다. 단편으로 써 내려간 끝 없는 사연들의 비행운(非幸運)을 읽어내며 실은, 나 살기도 너무 벅찬데 글로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싶었다. 이 책을 도저히 소화 시킬 수 없을 것 같아 결국 책을 읽다 내려 놓으면 《비행운》은 불현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너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데 조금 지쳐서’ 우리가 힘든 것뿐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불편하더라도 안 하면 허전한 브래지어처럼, 그래서 나는 《비행운》을 끼고 다녔다. 아닌 척 하려 무던히 애썼지만, 그 위로가 싫진 않았다. 


위태롭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면서 우리는 서로의 불행에 의지하며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가난이 미담이 아닌 수치가 되는 세상에서 결국 인맥과 돈이 전부가 되는 공간에서 설 곳 없는 우리는 서로의 불행에 기대 하루를 견뎌낸다. 「서른」의 수인을 보며 유난히 우리를 많이 떠올렸다. 우리의 절실함은 너무 무방비하고 희망은 너무 무기력하다.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_294)



돈이 전부라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데 돈이 전부라고 매일 깨닫는 세상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서른이 된 나도 좀처럼 쉽지가 않다. 얼마나 더 깨달아야 하는 것인지 기약없는 물음은 우리의 질문을 쉽게 뭉개버린다. 꿈을 꾸기엔 너무 늦어버린 나이일까, 결론 없이 넘겨져버린 단편집의 하나처럼 오늘의 나도 그렇게 결론 없이 하루를 넘긴다. 허공에 드러난 서로의 망상을 진실로 믿고 쫓으며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간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기 보다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으로 하루를 보낸다. 우리 서른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우울로 가득찬, 비행운(非幸運)으로 가득찬 그녀의 책 《비행운》을 꾸역꾸역 읽었지만, 이보다 더 많이 위로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그 문장이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우리 세대를 과도기적 세대라고 생각한다.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그 바꾸려는 노력이, 책임감이 없고 개인주의가 강하다는 그대들의 언어로 비하되는 그래서 저평가 되고 있는 시간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를 듣지 않아야 하고 보지 않아야 한다. 물론,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내가 있어서, 비행운의 그 한 구절처럼 내가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이 세상에는 결국, 수 많은 나로 이루어져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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