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더 이상 어제의 K가 아니었다. 각성의 힘
[System Wake up]
[User: K 대리 (로그人 성공)]
[Status: 사용자 행동 패턴 급변 감지]
의식이 돌아온 순간, 나는 직감했다. 오늘 K의 전압이 다르다.
평소라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겁고 축축한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꾸우욱...' 하고 마지못해 눌렀을 텐데.
오늘은 탁! 하고 짧고 경쾌하게 눌렀다.
마치 링 위에 오르는 복서가 글러브를 맞부딪치며
"자, 한판 붙어보자. 덤벼라, 세상아."라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위잉-
팬(Fan)이 힘차게 돌아가며 화면이 켜졌다.
[Warning: 기존 사용자 데이터와 불일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책상 아래의 풍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 밑 어둠 속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웅크리고 있던 그 낡은 갈색 구두가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물피리 소리를 내며 K의 자존감을 갉아먹던 그 흉물스러운 녀석 대신,
은은한 광이 나는 새카만 새 구두가 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발목이 짱짱하고 깔끔한 갈색 양말이 복숭아뼈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날랑 말랑해서 하루 종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 찌질하고 불안한 움직임은 온데간데없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면 위로 비친 K의 얼굴은 더 놀라웠다. 내 안면 인식 프로그램이 그를 'K 대리'로 인식하는 데 평소보다 3초가 더 걸렸을 정도다.
며칠 동안 면도날을 대지 않아 거뭇거뭇하고 초췌했던 턱은 말끔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싸구려 알코올 냄새가 아니라 은은하고 세련된 시트러스 향의 스킨로션 냄새가 풍겼다. 포마드를 잔뜩 발라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헤어스타일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뭐지? 데이터 오류인가? 로또 1등이라도 된 건가?'
나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외모가 아니라, 바로 업무를 대하는 태도, 즉 화면 위에서 일어났다.
오전 9시 30분.
어김없이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다. [김 팀장]이었다.
이 시간만 되면 내 스피커를 찢어발길 듯 울려대는 그 이름.
"K 대리. 어제 말한 수정안, 아직인가? 손이 왜 이렇게 느려? 5년 차 맞아?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요즘 신입들도 자네보단 빠르겠어."
텍스트에서조차 짜증과 비꼬는 말투가 뚝뚝 묻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K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을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채팅 창을 띄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비굴하게 자판을 두드렸겠지.
하지만 오늘 K는... 웃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팀장의 독설이 담긴 메시지를 3초간 빤히 응시했다.
그 눈빛은 공포나 당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팀장, 너의 그 뻔한 레퍼토리와 의중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한 수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유로운 게이머의 눈빛이었다.
탁, 타닥.
그는 망설임 없이, 아주 여유롭고 우아하게 답장을 쳤다.
"네, 팀장님. 현재 80% 진행 중이며, 지적하신 퀄리티 부분 보완하여
11시까지 송부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
군더더기가 없었다. 쫄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변명도, 죄송하다는 말도 없었다. 심지어 저 가증스러운 웃음 표시까지 붙이는 여유라니.
팀장이 저 이모티콘을 보고 혈압이 오를지언정, K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팀장과의 채팅창을 확인 사살하듯 쿨하게 최소화(Minimize)시켜버렸다.
인터넷 창을 검색하며 이직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타다닥, 탁! 타닥, 탁!
그때였다. 저 멀리서 팀장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감시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긴장해서 팬(Fan) 소리를 죽였다. 'K야, 피해! 들키면 끝장이야!'
하지만 K는 당황하지 않았다.
팀장이 내 뒤를 지나가기 직전, 그의 왼손 약지와 엄지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Alt + Tab]
화면이 0.1초 만에 전환되었다.
화려했던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안'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숫자가 빼곡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분기별 매출 분석 엑셀' 화면이 내 얼굴을 가득 채웠다.
K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게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며 업무에 몰두한 직장인의 연기를 펼쳤다.
팀장이 K의 등 뒤를 쓱 지나가며 힐끔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음, 그래. 열심히 하고 있군."
팀장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K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Alt + Tab]
다시 '인터넷 창'으로 복귀.
히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 쿨링팬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우리 K, 일하는 척 기술 점수 100점 만점에 200점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두 위로 뜨거운 눈물을 떨구던 패배자 K, "난 안 될 거야"라며
신세 한탄을 반복하던 그 나약한 K는 더 이상 없었다.
오타가 나거나 생각이 바뀌면 쿨하게 지우고 다시 썼다.
과거의 실수를 지우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쭈뼛거리며 썼던 비굴한 문장들을 지우는 것도 아니었다.
더 나은 문장, 더 나은 아이디어, 더 나은 미래를 쓰기 위한 힘찬 도움닫기처럼 백스페이스를 연타했다.
내 배터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불쾌한 과열(Overheat)이 아니었다.
K의 뜨거운 열정이, 희망이, 그리고 그 유쾌한 반란이 내 회로를 타고
흐르며 만들어내는 심장이 뛰는 듯한 기분 좋은 열기였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