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업무용 노트북이 본 K의 변화

K는 더 이상 어제의 K가 아니었다. 각성의 힘

by 유블리안

​[System Wake up]
[User: K 대리 (로그人 성공)]
[Status: 사용자 행동 패턴 급변 감지]

​의식이 돌아온 순간, 나는 직감했다. 오늘 K의 전압이 다르다.
평소라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겁고 축축한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꾸우욱...' 하고 마지못해 눌렀을 텐데.
오늘은 탁! 하고 짧고 경쾌하게 눌렀다.

마치 링 위에 오르는 복서가 글러브를 맞부딪치며

"자, 한판 붙어보자. 덤벼라, 세상아."라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위잉-
팬(Fan)이 힘차게 돌아가며 화면이 켜졌다.

[Warning: 기존 사용자 데이터와 불일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책상 아래의 풍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 밑 어둠 속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웅크리고 있던 그 낡은 갈색 구두가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물피리 소리를 내며 K의 자존감을 갉아먹던 그 흉물스러운 녀석 대신,

은은한 광이 나는 새카만 새 구두가 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발목이 짱짱하고 깔끔한 갈색 양말이 복숭아뼈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날랑 말랑해서 하루 종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 찌질하고 불안한 움직임은 온데간데없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면 위로 비친 K의 얼굴은 더 놀라웠다. 내 안면 인식 프로그램이 그를 'K 대리'로 인식하는 데 평소보다 3초가 더 걸렸을 정도다.
며칠 동안 면도날을 대지 않아 거뭇거뭇하고 초췌했던 턱은 말끔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싸구려 알코올 냄새가 아니라 은은하고 세련된 시트러스 향의 스킨로션 냄새가 풍겼다. 포마드를 잔뜩 발라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헤어스타일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뭐지? 데이터 오류인가? 로또 1등이라도 된 건가?'
​나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외모가 아니라, 바로 업무를 대하는 태도, 즉 화면 위에서 일어났다.

​오전 9시 30분.
어김없이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다. [김 팀장]이었다.
이 시간만 되면 내 스피커를 찢어발길 듯 울려대는 그 이름.
​"K 대리. 어제 말한 수정안, 아직인가? 손이 왜 이렇게 느려? 5년 차 맞아?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요즘 신입들도 자네보단 빠르겠어."

​텍스트에서조차 짜증과 비꼬는 말투가 뚝뚝 묻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K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을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채팅 창을 띄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비굴하게 자판을 두드렸겠지.

​하지만 오늘 K는... 웃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팀장의 독설이 담긴 메시지를 3초간 빤히 응시했다.
그 눈빛은 공포나 당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팀장, 너의 그 뻔한 레퍼토리와 의중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한 수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유로운 게이머의 눈빛이었다.


​탁, 타닥.


그는 망설임 없이, 아주 여유롭고 우아하게 답장을 쳤다.

​"네, 팀장님. 현재 80% 진행 중이며, 지적하신 퀄리티 부분 보완하여

11시까지 송부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
​군더더기가 없었다. 쫄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변명도, 죄송하다는 말도 없었다. 심지어 저 가증스러운 웃음 표시까지 붙이는 여유라니.

팀장이 저 이모티콘을 보고 혈압이 오를지언정, K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팀장과의 채팅창을 확인 사살하듯 쿨하게 최소화(Minimize)시켜버렸다.
인터넷 창을 검색하며 이직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타다닥, 탁! 타닥, 탁!

​그때였다. 저 멀리서 팀장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감시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긴장해서 팬(Fan) 소리를 죽였다. 'K야, 피해! 들키면 끝장이야!'
​하지만 K는 당황하지 않았다.

팀장이 내 뒤를 지나가기 직전, 그의 왼손 약지와 엄지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Alt + Tab]

​화면이 0.1초 만에 전환되었다.
화려했던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안'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숫자가 빼곡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분기별 매출 분석 엑셀' 화면이 내 얼굴을 가득 채웠다.
K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게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며 업무에 몰두한 직장인의 연기를 펼쳤다.

​팀장이 K의 등 뒤를 쓱 지나가며 힐끔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음, 그래. 열심히 하고 있군."

팀장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K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Alt + Tab]

​다시 '인터넷 창'으로 복귀.
히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 쿨링팬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우리 K, 일하는 척 기술 점수 100점 만점에 200점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두 위로 뜨거운 눈물을 떨구던 패배자 K, "난 안 될 거야"라며

신세 한탄을 반복하던 그 나약한 K는 더 이상 없었다.

오타가 나거나 생각이 바뀌면 쿨하게 지우고 다시 썼다.

과거의 실수를 지우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쭈뼛거리며 썼던 비굴한 문장들을 지우는 것도 아니었다.
더 나은 문장, 더 나은 아이디어, 더 나은 미래를 쓰기 위한 힘찬 도움닫기처럼 백스페이스를 연타했다.

​내 배터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불쾌한 과열(Overheat)이 아니었다.
K의 뜨거운 열정이, 희망이, 그리고 그 유쾌한 반란이 내 회로를 타고

흐르며 만들어내는 심장이 뛰는 듯한 기분 좋은 열기였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