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 오후] K가 팀장을 대하는 방법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가벼운 K

by 유블리안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후 1시. 직장인들의 영혼이 가장 흐물흐물해지는 식곤증의 시간.


K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지만, 오전만큼 경쾌하진 않았다.


인터넷 브라우저의 열기만으로 버티기에,

회사의 오후 업무는 지독하게 지루하고 무거운 현실이었다.


​오후 3시. 위기가 찾아왔다.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길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K의 등 뒤에서 딱 멈췄다.


​"K 대리. 아까 보낸 중간보고 말이야."

​나는 긴장해서 팬(Fan) 소리를 죽였다.

K의 손목이 닿은 팜레스트가 순간 뜨거워졌다.

[Alert: 사용자 심박수 급상승 감지]

팀장의 그림자가 내 화면 위로 검게 드리워졌다.


​"이게 최선인가? 5년 차가 정리한 것치곤... 인사이트가 너무 뻔하지 않나?

신입들이 긁어온 자료랑 뭐가 달라? 좀 더 '엣지' 있게 못 해?"


​팀장의 말은 오전보다 더 끈적하고 날카로웠다. K가 오전의 기세로 덤빈 걸 눈치챘는지,

일부러 기를 꺾으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엣지'라니. 구체적인 지시도 없이 추상적인 단어로

사람을 쪼는 전형적인 화법이었다.


평소라면 K는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리고, 내 키보드 위에 식은땀을 떨궜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K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 화면에 문장들이 빠르게 박혔다.


​'구체적인 방향도 안 주면서 무조건 엣지 있게 하라니요.

팀장님 머릿속에 있는 걸 독심술로 알아내라는 겁니까?

본인도 모르면서 왜 저한테만 그럽니까.'


​엄청난 속도의 타이핑. 억눌려왔던 답답함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팀장이 흠칫 놀라 모니터를 보려는 그 찰나의 순간.

K의 새끼손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Backspace]


타다다다닥.

​지워진다.

억울함도, 답답함도, 따지고 싶은 마음도.

순식간에 하얗게 비워진 입력창.

​이것은 비굴한 후퇴가 아니다. 전략적 인내다.


감정을 쏟아내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K는 그 빈자리에 차가운 이성을 다시 채워 넣었다.


​"지적하신 부분, 경쟁사 최신 동향 데이터를 추가해서 30분 내로 보완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로 증명하겠습니다."


​건조하지만 단단한 문장.

감정이 섞이지 않은 완벽한 사무적 태도.

팀장은 K의 화면과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더 이상 트집 잡을 꼬투리를 찾지 못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쳇. 그래, 수치로 가져와 봐. 빨리 보내고."


​팀장이 멀어지자 K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승리가 아니다. 그저 방어해 냈을 뿐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영혼까지 털린 패잔병의 한숨이 아니었다.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고 난 병사의 거친 호흡이었다.


​오후 6시. 정시 퇴근.

K는 칼같이 가방을 싸지 않았다.

아직 정리할 데이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묵묵히 남은 엑셀 칸을 채웠다.


'일하는 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보고서는 이제 팀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훗날 K가 이 회사를 떠날 때 가져갈

'무기(경력 기술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보험이랄까.


​6시 20분.

[저장 완료]


K는 그제야 마우스를 움직여 [시스템 종료] 버튼을 눌렀다.

​팟.

화면이 꺼졌다.

검은 액정(Black Mirror) 위로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과 K의 얼굴이 비쳤다.

환하게 웃는 얼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전투를 치른 탓에, 그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에 절어 있었다.

눈밑은 퀭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얼굴이 피지는 않는다.


회사라는 전쟁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하지만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

검은 화면 속의 자신을 응시하는 K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초점이 또렷했다.


​"버텼다."


​K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겼다"가 아니라 "버텼다"였다.


그는 나(노트북)를 덮으며 말했다.


"너도 고생했다. 가자."


평소처럼 거칠게 닫지도, 그렇다고 소중하게 닫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할 몫을 다 한 동료에게 보내는 담백한 인사였다.


​K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아래 있던 새 구두가 바닥을 짚었다.

아직은 새 가죽이 뻣뻣해서인지, 아니면 하루 종일 긴장하고 서 있었던 탓인지

발뒤꿈치가 조금 까진 것 같았다.


그는 살짝 절뚝거렸지만, 멈추지 않고 출구로 향했다.

​나는 가방 속 어둠에 잠기며 생각했다.


K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낡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집으로 가는 길.

그는 또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 내일 팀장이 또 엉뚱한 지시를 하면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 그가 이불속에서 이불킥을 하며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오늘, 스스로를 지켰으니까.


​K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새 구두를 조심히 벗어놓고 세척을 했다. 헥헥 대며 펄쩍 뛰는 초코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의 정말 소중한 폴더블폰은 접어서 협탁 위에 조심히 놓아두었다.

그는 더 이상 우울한 30대 청년이 아니다. 변화를 시도하며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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