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는 저를 덮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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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문이 열리는데, 이번엔 발소리가 들립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입니다.
전처럼 끌려오듯 들어오지도 않고,
예전처럼 기운 없이 밀려오지도 않습니다.
“약사님,
전에 주셨던 그거요.”
“대충하라… 뭐였죠.”
아, 그 직원입니다.
항상 제일 늦게 불이 꺼지던 자리,
메일에 ‘죄송합니다’를 제일 먼저 적던 사람.
〈대충하라공진단〉을 처방받고 돌아갔던 그분입니다.
그 직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성실하고,
여전히 책임감이 강합니다.
다만, 모든 일을 다 끌어안지는 않습니다.
예전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지금 해야 할 일만 테이블 위에 올려둡니다.
“예전엔요,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았거든요.”
“근데 안 해도…
회사가 바로 무너지진 않더라고요.”
아주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회의실에서의 모습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고개만 끄덕이던 자리에서
요즘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이건 이번 주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우선순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아요.”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문장은 예전보다 단단합니다.
버티는 힘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완벽하진 않습니다.
바쁜 시즌이 오면
예전 습관이 고개를 듭니다.
다시 모든 걸 잘 해내고 싶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럴 땐
공진단 생각이 나요.”
“아, 지금 또
과다 복용 중이구나 하고요.”
이 약의 효과는
몸보다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약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다만 쓰러지기 전에 자기 자신을 붙잡게 해주는 약입니다.”
그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엔 습관적인 예의가 아니라,
이해의 끄덕임이었습니다.
“번아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직원은
다시 불타오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꺼질 것 같을 때
스스로 불을 낮출 줄 압니다.
유블리안 약사의
오늘 경과 관찰은 여기까지입니다.
〈대충하라공진단〉은
필요할 때만
꺼내 먹는 약입니다.
그 직원도,
아마 우리도
그래서 아직
책상 서랍에
그 약을 넣어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