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안아 파스〉 붙인 사람의 90일 후

분노는 남아 있지만, 전처럼 휘두르지 않습니다

by 유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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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문이 열릴 때,
예전처럼 문이 먼저 밀리지 않습니다.
걸음이 빠르지도, 과장되지도 않습니다.


의자에 앉기 전,
그는 잠깐 숨을 고릅니다.


“약사님.”


이번엔 목소리가 낮습니다.
억울함도, 방어도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요즘은… 화가 나도 예전 같진 않습니다.”


그는 〈분노 강하제〉와 〈마음 안아 파스〉를 처방받았던 사람입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의 온도가 늘 문제였던 사람.
말을 마친 뒤 스스로를 더 심하게 몰아붙이던 사람이었습니다.



1. 화가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민합니다.
업무가 느슨해지면 답답하고,
책임이 흐릿해지면 불안해합니다.


다만 달라진 건,
화를 확신하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전엔 화가 나면
“내가 맞다”는 생각이 먼저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지금 내가 예민한 상태일 수도 있겠다”가
조금 먼저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분노를 바깥으로 밀어내기보다
잠시 안으로 붙잡아 둡니다.


“이제는요, 화가 나도 제 감정을 바로 믿진 않습니다.”


그 말은 그가 약을 먹었다는 증거라기보다,
연습을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2. 파스는 남에게 붙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음 안아 파스〉는
타인을 이해하라는 약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진정시키는 약이었습니다.


예전의 그는
화를 내고 돌아와서
혼자서 또 화를 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말했지.”
“왜 나는 이렇게 날카롭지.”


요즘은 다릅니다.


“그날 많이 피곤했더라고요.”
“그 상태에서 회의 들어간 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자책 대신 분석.
이건 큰 차이입니다.
마음을 안아본 사람은
타인을 공격하기 전에
자기 상태를 먼저 확인합니다.



3. 공간의 질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의가 끝나도, 사람들이 예전처럼 바로 흩어지진 않습니다.”


예전엔 그가 말을 마치면
공기가 잠깐 멈췄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급히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요즘은 다릅니다.
그의 말이 끝나도
다른 의견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웃음이 섞이기도 합니다.
환호는 없습니다.
극적인 박수도 없습니다.
다만, 공기가 얼지 않습니다.


이건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아주 큰 차이입니다.




아직 남아 있는 구간


물론 완벽하진 않습니다.
피곤한 날엔 여전히 날이 섭니다
급박한 상황에선 목소리가 빨라집니다
가끔은 예전 방식이 더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하루가 끝났을 때 제 자신이 덜 피곤합니다.”
그게 회복의 기준입니다.



약사 관찰 노트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여전히 기준이 높고,
여전히 강한 사람입니다.
다만 이제는
강함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분노를 무기로 쓰던 사람이
분노를 신호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줄 경과 기록

“분노는 줄어들지 않아도, 그 방향은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약을 끊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날엔 〈분노 강하제〉를 떠올리고,
마음이 거칠어질 때면
조용히 〈마음 안아 파스〉를 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치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돌리진 않습니다.


유블리안 약사의 경과 관찰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편은 최종 에필로그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