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와 침묵 사이
첫날 배정받은 숙소는 낯선 공기만큼이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가방을 풀고 침대를 정리하면서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멋쩍은 웃음만 오갔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갔지만, 서로를 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몇 마디 대화는 금세 끊겼고, 우리는 그저 ‘함께 있으나 아직은 혼자인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교육담당자의 첫마디는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여러분, 아직 최종 합격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잘 버텨야 비로소 진짜 사원이 됩니다.” 순간 몇몇은 얼굴이 굳었고, 나 역시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예비 합격자’라는 꼬리표가 우리를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세워두는 듯했다. 곧바로 체력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조 편성이 끝나자마자 ‘낙오 없이 전원이 목적지까지 들어와야 한다’는 규칙이 주어졌다. 길은 생각보다 험했고, 신발 밑창이 흙길을 쓸며 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뒤엉켰다. 누군가가 속도를 놓치면 나머지 모두가 멈춰 서야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손이 오갔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동기의 손목을 잡아주고, 지친 여직원의 손을 붙잡아 끌어주며 발걸음을 맞췄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잠시 손을 맞잡은 것뿐인데, 그 순간엔 풋풋한 설렘과 막 싹트는 동료애가 교차했다. 협력과 경쟁, 불안과 설렘이 한데 뒤엉키던 순간이었다.
마침내 전원이 함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날 우리는 기록보다, 끝까지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어색했던 첫 만남은 그렇게 땀과 온기 속에서 조금씩 풀려나갔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회사의 일원으로서 생각하고 호흡하는 법을 체득하는, 일종의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호랑이 팀장’의 매서운 눈빛은 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번 고개가 꺾이면 어김없이 이름이 불렸다. 오전은 규정과 절차, 오후는 사례와 보고서. 머릿속이 빽빽해질수록 마음은 더 단단해져야 했다.
며칠 뒤, 긴장을 풀어내는 밤—장기자랑과 단합대회가 열렸다. 술잔이 돌자 분위기는 금세 과열됐고, 몇몇 동기들은 우람한 팔뚝을 뽐내듯 즉흥적으로 상의를 걷어 올렸다. 환호가 터졌다. 내 차례가 오자 마이크를 잡고 일부러 속도를 낮췄다.
“분위기가 많이 달아올랐네요. 저는 차분한 노래로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동기들아. 어디로 배치되든, 마음만은 같이 있자”는 말을 덧붙이고 넥스트의 ‘Here I Stand for You’를 불렀다. 목소리를 깔고 첫 소절이 흘러가자 술렁임이 환호로 바뀌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날 이후, 그 노래는 우리 기수만의 비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유쾌함 속에 섞인 진심이 서로를 조금 더 믿게 했다.
입사식이 끝나고 드디어 부서 배치가 시작됐다. 사회자가 한 명씩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는 환하게 웃으며 새로운 자리로 걸어갔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짙어졌다. 다른 이름들이 하나둘 불릴 때, 내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혹시 누락된 건 아닐까, 온갖 상상이 몇 초를 몇 분처럼 늘렸다.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다. 회의실 책상 위엔 새 명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을 보니 합숙과 교육을 함께했던 여섯 동기가 앉아 있었다. 아는 얼굴들 덕분에 낯설기만 하던 사무실 공기가 한순간에 환해지는 듯했다. 대학 시절 함께 공부하던 두 후배는 이미 이곳의 선배로 서 있었고,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그 눈빛이 큰 위로가 됐다.
곧바로 부서의 최고 책임자인 상무님과의 면담이 이어졌다.
“아, 면접 때 손들고 얘기한 친구구만. 잘 왔어.”
악수가 이어졌다. 동기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스쳤고, 가슴에는 또 다른 긴장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자리로 돌아오자 현실이 눈앞에 명확해졌다. 회계팀. 작은 실수 하나가 회사 자금에 바로 닿는 자리. 첫날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제의 제목처럼, 그저 눈치와 침묵으로 공간의 일부가 되는 것뿐이었다.
CRT모니터 글자에 맞춰 나는 기계식 타자 소리, 전화벨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에 내 호흡을 맞췄다. 그렇게 일주일, 숫자와 계정과목에 몸을 적셨고, 드디어 정식 인사발령 문서에 내 이름이 찍혔다. 설렘과 책임이 동시에 어깨를 눌러앉는 소리였다.
드디어 시작된 점포 생활, 첫 업무 분장과 인수인계. 설렘은 오래가지 않는다. 선배들의 날 선 갑질에 공기는 무거워지고, 먼저 와 있던 동기의 작은 실수 하나가 부서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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