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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핀오프] 백성을 사랑했던 임금

경복궁의 어느 늦은 밤, 2025년을 아뢰다

by 유블리안

경복궁의 밤은 먹물처럼 깊었다. 작은 전각 안, 희미하게 타들어 가는 촛불만이 갓 다른 세상에서 돌아온 두 사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한 사내는 조선 최고의 공학자 장영실이었고, 다른 한 사내는 집현전의 심장이라 불리는 학자 성삼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넋을 놓은 듯했으나, 그 빛은 사뭇 달랐다. 장영실의 눈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경이(驚異)와 흥분이 불꽃처럼 타올랐고, 성삼문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유(思惟)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용상에 앉은 이도(李祹)가 그 둘을 꿰뚫어 보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이리 다르니, 같은 것을 보고 온 것이 맞는다더냐. 한 사람은 세상을 얻은 듯하고, 한 사람은 세상을 잃은 듯하구나. 영실이 먼저 아뢰어 보아라.”


기다렸다는 듯, 장영실이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 그곳은 실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듯한 기술의 세상이었나이다! 유리탑은 구름에 닿았고, 말 없는 쇠마차는 바람처럼 달렸으며, 거대한 쇠새는 사람들을 싣고 구름 위를 날았나이다! 소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발명품들은… 그저 옛이야기 속 골동품일 뿐이었사옵니다!”


기술자의 경외감 섞인 보고가 끝나자, 이도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돌려 침묵하는 성삼문을 보았다.


“삼문아. 그대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느냐. 저 기술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던가?”


성삼문이 고요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장별좌가 본 기술들은 허공에 뜬 신기루가 아니었나이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글이었습니다. 밤하늘보다 많은 글자들이 빛이 되어 도시를 밝혔고, 모든 백성이 손바닥만 한 서책(書冊)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실시간으로 읽고 있었나이다.”


그의 말에 장영실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 손바닥만 한 옥판(玉板) 하나로 집을 사고, 쌀을 사고,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더이다! 그 안에 적힌 것이 모두 글자였습니다!”


성삼문이 다시 고요히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글자는… 왕족도, 학자도, 아녀자도… 모두가 같은 글자를 쓰고 있었사옵니다. 신이 전하의 곁에서 만들었던, 바로 그 스물여덟 글자로 온 세상이 소통하고 있었나이다.”


그의 말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장영실이 말을 거들었다.


“전하, 더 놀라운 것은 그 백성들은 서로 간의 대화보다는 필답(筆答)으로 많은 소통을 하고 있었나이다. 함께 마주 보고 있어도 작은 옥판에 글자를 새겨 넣고 표정을 그림으로 넣어서 주고받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장영실의 보고에 이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성삼문은 그 기색을 읽고 말을 이었다.


“하오나 전하,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미래의 백성들은 전하께서 글자를 반포하신 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었사옵니다. 해마다 열 번째 달, 아흐렛날이 되면 온 나라가 일을 멈추고 그날을 기렸습니다. 그들은 그날을 ‘한글날’이라 부르며,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든 성군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뜻을 되새기는 가장 큰 명절로 삼고 있었나이다.”


‘한글날’. 그 낯선 단어에, 늘 굳건하던 이도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의 진심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백성들에게 온전히 닿았다는 사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그때, 성삼문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그의 표정에는 감격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다.


“전하… 소신, 외람되오나 그곳에서 소신의 이름을 찾아보았나이다. 소신의 이름 앞에는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멍에가 씌워져, 평생을 바친 학문보다 죽음의 절개만이 남아 있었사옵니다. 허나…”


성삼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의 존함은 함부로 부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나이다. 후대의 왕들이 전하께 ‘세종(世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더이다.”


이도가 나직이 되뇌었다.


“세종…?”

“예, 전하. ‘세상 세(世), 으뜸 종(宗)’. ‘한 시대를 연 가장 으뜸인 임금’이라는 뜻이옵니다. 그 이름 뒤에는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을 붙여,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계셨나이다. 소신의 이름이 죽음의 그늘에 갇혀 있을 때, 전하의 이름은 글자의 빛이 되어 영원히 빛나고 있었사옵니다. 결국… 전하의 ‘마음’이 이긴 것이옵니다.”


성삼문의 고백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도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마침내 흘러내렸다. 기술의 성취와 인문의 승리, 두 신하의 보고가 하나의 감격이 되어 왕의 마음에 닿은 순간이었다.


이도는 손등으로 조용히 눈물을 닦아냈다. 감정을 추스른 그는, 지친 듯 그러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에게 묻겠다.”

“예, 전하.”

“그리… 글로서 소통하고, 기술로써 풍요로워진 나의 백성들은… 진정 행복해 보이더냐?”


이도의 마지막 질문에, 경이로 가득 찼던 장영실과 고뇌에 잠겨 있던 성삼문이 나란히 침묵에 빠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전각의 촛불이 길게 흔들리며, 그들의 그림자를 벽 위에 아로새겼다.




[작가의 말]


긴 여정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짧은 스핀오프를 준비했습니다.


두 사람이 세종의 마지막 질문에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들은 눈부신 발전의 빛과 함께, 남과 북으로 허리가 잘린 조국의 아픈 현실이라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술과 문자는 이뤘지만, 진정한 ‘하나’는 이루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두 신하의 침묵 속에는,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룬 것과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가장 무거운 대답이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님의 업적을 다시 한번 떠올리기 위해서 한글날에 맞춰서 올려 봤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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