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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ug 25. 2020

선생님 같은 어른은 안 될 거예요.

반면교사를 만난 체육특기생



이거 네가 쓴 거 아니지?



꼭 그렇게 말했어야 했나. 저마다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어낸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는 친구들의 시선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한다. 교실 앞, 투박한 표정의 여교사. 볼펜 뒤쪽을 수차례 건드린다. 딸깍딸깍. 


- 제가 쓴 거 맞는데요.

- 네가 이렇게 쓸 수 없는데?

-...

- 넌 운동하느라 학교도 안 나오는데, 어떻게 이렇게 글을 써. 말이 안 되지.



굳이 틀린 말을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운동선수였고, 고등학교도 특기생의 자격으로 왔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올 수 없는 학교를 특기생의 자격으로 왔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운동선수 생활은 여느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시간표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등교시간은 다른 학생들보다 2~3시간 정도는 빠르다. 운이 좋으면 아침 운동이고, 운이 나쁘면 새벽 운동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 탓에 학교 소속 운동부는 원 없이 산을 뛰었다. 아침에 지각해도 뛰고, 점심을 늦게 먹어도 뛰고, 체육시간은 당연히 뛰었다. 한바탕 숨을 몰아내고 나면,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있어 일찍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뺏기 좋다. 계절에 상관없이 시작되는 아침은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아침인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방학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합숙 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는 수업을 듣는다는 핑계로 육체적 회복이 가능했지만, 합숙 훈련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오로지 운동만 있을 뿐이었다. 새벽 4~5시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밤 11시가 넘어야 끝났으며, 식사 뒤처리와 숙소 정리 같은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해야만 했고, 대략 한 달의 시간 동안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나는 무지막지하게 성장해있었다. 






'운동선수 무식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자주 책을 읽었다. 제대로 된 시험공부는 아니었지만 시험이 다가오면 마음 착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속성 과외를 받기도 했고, 너무 막막한 머리는 아니었던지라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도서관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 탓에 집에는 책이 많았고,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매일 운동일지를 써야 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날의 운동량을 복기하며 세세히 기록하였고, 나의 느낀 점과 고쳐야 할 점들을 매일 밤마다 기록했다. 나는 아마 이때부터 '매일 하는 것'의 힘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운동선수들의 특징을 함부로 정의할 수 없지만,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는 것은 당부할 수 있다. 안정된 소속감에 튀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학생들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깊은 생각과 결단력을 요구한다. 종목에 상관없이 꽤 큰 비용도 필요하며, 매일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다 이내 원하는 목표에 달성되는 기쁨을 누린다. 다른 행동으로 다른 사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정규 교육을 상대적으로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환경으로 인해 나쁘지 않은 글쓰기 실력을 갖추고 있던 운동선수였다. 그런 정체성을 단박에 흔들어버린 것은 도덕스럽지 못한 도덕 시간에 일어난 도덕 선생님의 부도덕한 말 때문이었다. 그 선생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애초에 내가 쓴 글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교사와 대립하는 학생으로 존재한 건 그 시간이 처음이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고, 나는 선생의 면전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실에서 퇴장해 고립된 공간을 찾아가게 된다.






그 교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운동하는 애들은 싹수가 없어'라고 생각했을까. '정신 나간 학생'이라 생각했을까. '재수 없이 똥 밟았다' 생각했을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이 없다. 나는 그녀를 통해 반면교사를 만났고, 적어도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날의 하굣길을 정확히 기억한다.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곱씹으며 했던 말. 

'선생님 같은 어른은 안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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