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기차 여행 첫째 날
2025년 1월 9일.
종업식이 막 끝난 아들을 납치하듯 조치원역으로 데리고 갔다. 기차를 타고 4일 동안 대한민국을 'ㅁ' 모양으로 크게 도는 여정이다. 순천과 울산에 가보고 싶었고, 얼마 전 개통한 동해선 열차도 타보고 싶었던 우리에게 최고의 선택지는 '내일로 패스'였다. 일주일 전, 패스를 구입하러 조퇴까지 해 오송역에 다녀왔다. 알고 보니 코레일 앱에서 간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일로 패스가 있으면 KTX 좌석은 기간 내 2회, 일반열차의 좌석은 1일 2회 예약할 수 있다. 입석이나 자유석은 횟수 제한이 없으므로 좌석에 앉는 것만 포기하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게 된다. 유레일 패스처럼 좌석을 예약할 때마다 추가 요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JR패스처럼 비싸지도 않으니 국내 여행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패스다.
일주일 전에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 치고는 꽤 괜찮은 계획이 세워졌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꽤 즐기는 사람이라 계획이 근사한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떠났는데 선로 위 열차처럼 주어진 길로만 가고 싶진 않다. 가끔은 한 번씩 탈선도 해줘야지!
나의 여름 아이 둘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고, 둘째는 돌을 조금 넘겼다. 둘째에게 훨씬 더 손이 많이 가는 시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으로의 '신분 상승'이 주는 특권과 그에 걸맞은 섬세한 보살핌을 누리지 못한 채 계속 양보하고, 기다리며 고군분투했다.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었을 첫째 아이를 위해 둘째는 서울의 부모님께 부탁드리고 단둘이 떠나기로 했다.
조치원역의 철도 선로는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역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고, 그 고요함에 더해진 순백색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마치 시간을 가르듯 화물 열차가 특유의 리듬감 있는 소리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선로에 쌓여 있던 눈들은 사방으로 흩날리고, 그 순간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ITX 새마을 1084호에 몸을 싣고 어디에 얼마나 눈이 왔는지도 구경하고, 빠르게 몰려오는 어둠도 감상했다. 좌석마다 놓여 있는 잡지도 한 번 뒤적였고, 둘째의 기저귀도 갈았다. 창밖 풍경이 완연한 도심으로 바뀌었을 무렵 칭얼거리기 시작한 아이와 통로에서 잠시 걸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에서 중심을 잡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넘어지는 게 그리도 우스운지. 까르르 웃는 볼에 보조개가 파인다. 이동 중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용산역에서 주어진 시간은 30분. 부모님을 만나 아이들 저녁 식사를 부탁드렸다. 나는 쇼핑몰로 냅다 달렸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아들의 내복과 모자가 필요했다. 타고난 길치인 나는 쇼핑몰에서만큼은 인간 내비게이션이다. 엄청난 속도로 쇼핑을 마치고, 식당에서 허겁지겁 국물을 들이켰다. 부모님과 둘째 아이와 헤어져 서둘러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KTX 521호 열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동력객차인 1호차에 탑승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승객이 꽤 많다. 저마다 치열하게 보냈을 하루의 고단함이 스민 객차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우리를 남쪽으로 데려가 준다. 천안아산역을 지날 즈음부터 잠든 아들은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했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겨우 일어나서는 잠에서 덜 깬 불편함과 단잠을 방해받은 분노로 씩씩거렸다. 게다가 1호차는 대합실과 가장 멀었다. KTX는 무려 20량 1개 편성에, 총길이는 388.1m나 된다. 바람은 또 얼마나 거센지, 아들은 그 긴 거리를 울면서 달렸다.
"그러니까 내가 1호차 예약하지 말랬지!"
"그러게, 1호차가 역이랑 가장 가까운 쪽인 줄 알았어. 미안미안."
예약을 잘못한 엄마 탓을 하도록 두고, 자신의 전동차 지식을 뽐낼 수 있도록 북돋아 줬더니 아들의 화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전에도 묵었던 호텔이라 가는 길이 기억난 걸까. 아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기차를 좋아한 건 아들이 먼저였는데, 지금 보니 내가 더 기차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들은 자라면서 새로운 것을 더 많이 접하고, 취향이 바뀌며 좋아하는 것들의 우선순위도 바뀔 텐데. 나는 이제 좋아했던 것들을 덜어내고, 그중에서 포기할 건 포기하며 다듬어 가는 중이니, 앞으로 기차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건 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