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기차 여행 둘째 날
간밤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로비를 둘러보지 못했던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옷을 입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숙소에 더 이상 축구 테이블은 없었다. 5살이던 아들은 아빠와 함께 30분 정도 테이블 축구를 했고, 그 기억은 여수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소환됐다. '여수 가면 그 축구 게임 또 할 거야.'라며 기억을 붙잡으려 말로 되새기던 아들이었다. 아쉬워하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여수엑스포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는 낯설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재방문한 여행지에서는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몇 년 전에 왔더라?', '이것 참 좋았는데!', '다시 오면 이걸 꼭 해보려고 했었지.' 그렇게 과거의 나는 나에게 말을 걸며 여수엑스포역 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내일로 패스는 연속 7일권과 선택 3일권, 두 종류가 있다. 선택 3일권으로 4일 동안 하는 여행이었기에 가장 이동이 적은 날은 제외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래서 오늘 탑승할 두 편의 열차는 패스를 사용하지 않고, 따로 예약했다.
순천역까지 ITX-마음을 타고 간다. 2023년 9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한 ITX-마음은 새마을호, ITX-새마을과 동급의 열차다. 어디에서 눈을 맞고 왔는지 연결 부위에 눈이 가득 끼어 있다.
열차 안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승객들이 앉아 있었고, 햇빛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따사로웠다. 순천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년 전, 순천에 배구를 보러 왔을 때는, 말 그대로 배구만 보고 돌아갔기 때문에 '순천을 와봤다'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배구부 학생들을 인솔해서 간 거라 관광보다는 식사가 중요했다.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메뉴인가? 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가? 시합장과 가까운가? 한참을 검색해 찾아간 음식점은 다행히 아주 만족스러웠다. 함께 간 코치님께서 순천만 국가정원이 정말 좋으니 다음에 꼭 가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순천은 내 여행 위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순천역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주인도 놀러 오는 순천'이라는 슬로건이다. 순천이 여러모로 항공우주산업에 진심인 게 느껴졌다. 순천역 스탬프는 창구 밖에 나와 있고, 종류도 네 개나 있다. 스탬프를 찾는 사람이 꽤 있었나 보다.
순천역 안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전광판에 남도해양열차의 이름이 떴다. 30분 뒤 순천역에 도착이라는데 어쩌지? 시간 개념이 별로 없는 아들은 '당연히 보고 가야지!'를 외친다. 순천에서 6시간 머물 예정이고, 30분이면 무려 1/12이지만 과선교에 올라 보고 가기로 한다.
열차는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정확한 시각에 역에 도착한다. 열차는 내가 있는 곳을 우연히 지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시간과 장소의 교집합으로 성사된 철저히 예정된 만남이다. 살다 보면 우연히 다가오는 사랑, 우연히 만나는 행운 같은 게 있는데 그건 사실 우연이 아니다. 내 과거가 만든 업보들이 쌓여 만든 열차 시간표에 따라, 언젠가는 만나게 설계되어 있는 선로 위에서 우연인 것처럼 마주친 필연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한국 세계 5대 연안습지 중 하나이고,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이다. 약 112만㎡에 달하는 부지에 자연 생태와 조경 예술이 어우러져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가장 먼저 스카이큐브를 타러 갔다. 순천만 정원과 순천문학관 구간(4.64㎞)을 오가는 소형 무인궤도 열차(PRT)로 하늘택시로도 불린다. 친환경 교통수단이니 이 넓은 순천만을 이동하기에 가장 적절했을 것이다. 귀여운 초록색 열차에 둘만 탔다. 한껏 신이 나는 걸 보니 대중교통보다는 놀이 기구에 가까운 것 아닐까.
순천만역에 도착한 뒤 순천만 초입 무진교까지 1.2㎞ 거리를 갈대열차로 옮겨타 이동했다. 갈대열차라고 안내되어 있어 조금 기대했는데, 열차 모양을 한 자동차였다.
갈대밭이 자연의 규칙대로 출렁인다. 아주 오래된 약속처럼 움직인다. 바람이 눈에 보인다면 이런 모습일 거다.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우주인도 놀러 오는 순천'이 아니라 '다른 우주 같은 순천'이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갈대열차를 다시 타기 전 휴게소에 들어갔다. 내 커피를 시키며 아들이 먹을 만한 걸 둘러봤다. 삶은 계란이네?
"계란 먹을래?"
"싫어."
싫어도 먹으렴, 지금 안 먹으면 돌아가는 길 내내 배고프다고 할 거잖니. 하나보단 3개 사는 게 이득인 가격이었지만, 3개는 너무 과할 것 같아 2개만 주문했다.
"후회할 걸요? 우리 집 계란 진짜 맛있어."
"아... 괜찮아요!"
우리 둘 다 입이 짧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괜찮지 않아 졌고, 두 개를 더 주문했다.
갈대밭을 나와 다시 스카이큐브를 타고 정원역에 내렸다. 국가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며 1월의 냄새를 마음껏 즐겼다.
순천을 떠나기 전, 바로 근처에 있는 철도문화마을에 들렀다. 일제강점기에 철도 종사자들을 위해 조성된 관사촌이 지금은 문화마을로 그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순천철도마을박물관과 철도문화체험관에서 만난 직원분들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순천에 관사촌이 생긴 건 일제강점기 순천이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비옥한 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제는 철도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구축했고, 순천은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시대의 아픔과 구조적 수탈의 흔적 때문에 숙연해졌다.
이제 경전선을 따라 부전역으로 이동한다. 무궁화호의 오래된 좌석에 몸을 뉘이며,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존재와 수많은 사연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객차를 꽉 매운 승객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겠지. 달리는 무궁화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간다.